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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호준 Jan 08. 2020

벌새 (House of Hummingbird)

영화를 보고


1. 이 영화에는 왼손잡이가 두명 나온다. 나는 선천적 왼손잡이이나 후천적으로 오른손 글씨를 쓴다. 내가 왼손으로 글씨를 썻다면 내 좌뇌와 우뇌 구조가 바뀌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지금 어떤 성격을 갖고 어떤 인생을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글씨 쓰는 손마저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시대의 폭력을 느낀다.



2. 이 영화는 주제가 없는 것이 주제라는 생각이 든다. 인생의 큰 테마를 정해놓고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인생이 영화라면 그것은 주제가 있는 영화일까..특히 인생에서 94년이라는 한 시점을 놓고 본다면 더욱 주제는 모호해진다. 이 영화는 보편을 드러내기 위해 주제를 없애는 도전적인 선택을 했다. 보편이란 어떤 의미에서 강제적인 개념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고 보편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어떻게보면 독자를 선택한 책과 같다.



3.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얘기할때 항상 뜸을 들인다.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생각한 후 차분하게 말을 시작한다. 표정 하나하나도 신중하게 짓는다. 이 모든 것이 배려이고 따뜻함이다.



4. 살면서 큰 상처를 받아본 사람은, 이를 받고 있는 사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은희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였다. 은희의 입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세계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5. 영화에서 '모름' 이 두번 나온다. 첫번째는 한자 구절로서 사람들이 서로 아는 사람은 많으나 정작 서로의 속을 아는 사이는 매우 적다는 내용..두 번째는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에서 인생을 어떻게 살지 모르겠다는 것..수많은 정답들이 제출되는 세상에서 모른다는 것만큼 무책임한 답변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두가지 보편적인 무지의 상태에서 우리는 공감과 연대를 느낀다. 선생님의 마지막 편지는 그래서 뜨겁지 않지만 오래가는 온기가 있다.



6. 극적인 연출도 없고, 신파 감동 포인트도 없다. 그저 잔잔하지만 자신을 이방인, 아싸라고 생각한다면 영화의 긴 러닝타임은 순식간에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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