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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호준 Jan 08. 2020

Cogito ergo sum

생각나는대로 적기

 어처구니없게도 샤워를 하면서 우주적 관점에서 나의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137억년의 우주의 역사 속에서 '나'의 존재는 지극이 미미한 사건이다. 나의 존재와 내가 행한 사건 모두 전 우주적으로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지 못할 가능성이 높음을 나는 인지하고 있다. 나는 어느 유전학자의 말대로 특정 유전자를 나르는 그릇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나는 이런 물음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내가 존재하는지를 어떻게 아는가.  영화 매트릭스대로 나는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실체 없는 존재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는 매우 어렵다. 그렇게 된다면 과학적으로 나는 질량이 없는, 따라서 실체가 없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난 문득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단 하나의 증거를 떠올렸다. 그것은 바로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지금 보고 느끼는 이 모든 환경과, 내 몸뚱아리가 거짓일지라도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나의 존재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이며 반박 불가능한 증거인 것이다. 데카르트의 명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 문장은 결국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검증할 유일한 단서는 내가 사고한다는 것 뿐이라는 의미이다. 


 내 주위의 존재들도 마찬가지이다. '내 주위에 사물들이 존재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내가 안다는 사실이 내 주위의 모든 물체들을 존재하게 하는 근거인 것이다. 내가 모르는 물체에 대해서는 나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확신하지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인식하는 물체는 '생각하는 나' 라는 세계 안에서는 존재한다.  이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에 대해서 적용된다. 결국 우주 전체의 존재에 대한 근거도 결국 나의 존재, 엄밀하게 말하면 나의 생각인 것이다.


 따라서 우주와 노트북과 마우스, 우리집 개는 모두 나의 생각 안에 존재한다. 내가 인식하지 않으면 우주는 존재하는지 증명할 수 없다. 스티븐 호킹의 말대로, 우리 '생각하는' 인류의 두 귀 사이에는 우주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나라는 존재는 우주에서 가장 하찮으면서 또 그 우주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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