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던 버스 안의 에어컨 바람이 큰 위로가 되었던 날이 무색하게, 찬바람에 코트 단추를 여미다가 올라탄 버스 안이 포근하게 느껴지는 계절이 돌아왔다. 가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쉬워서인지. 첫추위가 더욱더 시리게 느껴져 몸을 움츠리게 하는 날이긴 했어도, 버스 안은 환한 햇살을 가득 싣고 있는 청명한 분위기였다. 여름이었으면 감히 앉지 못할 햇살이 쏟아지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배차간격이 좀 있었던 터라, 버스를 기다리며 차가워진 몸을 햇빛에 기대어 녹이고 싶었다. 나는 겨울 햇살의 보살핌을 받으며 버스의 덜컹거림과 기사님이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 정류장마다 울리는 하차 벨 소리를 녹녹히 듣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소리 가운데 누군가의 대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곤소곤’, ‘소곤소곤’
버스의 자리를 잡기 전, 내가 앉을 뒷좌석에 이미 앉아있던 젊은 커플의 소리였다. 둘의 이야기를 엿들을 생각도 없었지만, 정말 작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어서 대화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사실 둘의 대화를 듣고자 했다면, 바로 앞 좌석에 앉았던 나는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커플의 작고 조심스러운 목소리는 ‘소곤소곤’이라는 의성어로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겨울 햇살에 차가웠던 몸이 노곤하게 녹아가고, 커플의 ‘소곤소곤’ 대는 속삭임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일까, 맛집을 가는 길일까. 데이트하러 가는 버스 안에서 즐겁고 설레는 마음에 목소리가 좀 커질 법도 한데. 공공장소 안에서 커플의 배려심 있는 소곤거림은 버스 안의 달콤한 BGM이 돼주었다.
우리 신체 중에는 소곤대는 속삭임까지도 듣게 하는 기능을 가진 ‘귀’가 있다. 귀는 사람이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역할을 해내고, 제일 늦게 기능을 상실하는 감각 기관이라고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 판정을 받았거나 임종을 앞둔 환자에게 가족들이 계속해서 따뜻한 말을 건네고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끝까지 소임을 다하는 귀가 대견하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 측은한 마음이 든다. 보기 싫은 것은 눈을 질끈 감거나, 맡기 싫은 냄새는 잠시 숨을 참아서 냄새를 피할 수 있도록, 그 역할과 함께 스스로 거부하는 능력도 갖추고 있으나, 유독 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소음은 느닷없이 찾아오고, 듣기 싫은 소리가 들려도 귀 스스로 문을 닫거나 들리지 않도록 거부 행위를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손가락이나 손바닥의 도움을 받아 귀를 막거나, 혹은 귓구멍을 막을 수 있는 물질을 찾아 귀에 꽂지 않는 이상, 스스로 소리를 차단하지 못한다. 그래서 항상 문을 열어 둔 채, 원하든 원치 않든 세상의 모든 소리를 견뎌야 한다. 어찌 보면 꼬불꼬불 오묘하게 생긴 귀는 복잡하고 엄격할 것 같은데, 본인의 역할을 너그럽게 해내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의 귀를 편하게 해 줄 마음이 없는 듯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려대는 핸드폰의 각종 알림음, 기다림과 서툶이 허락되지 않는 도심 속의 자동차 경적에서 귀는 시달리고 있다. 공공장소에서 핸드폰의 스피커를 이용해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는 알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다. 그뿐만 아니라, 일방적으로 이야기를 독차지하는 사람과의 대화나 위층에 사는 사람의 발뒤꿈치에 달린 망치 소리는 견딜 수 없는 소음으로 존재한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고 성장하는 시대인만큼 사람들의 성급하고 배려 없는 마음도 성장하는 것인지, 소음은 점점 다채로워지고 그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소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집중과 휴식의 순간을 훼방하며 폭력적으로 다가온다. 공공장소에서 공유되는 즐거웠던 나의 하루나 중요한 업무 보고가 타인에게도 알고 싶은 정보일지 생각해 본다.
우리는 이런 소음에 맞서 ‘소곤소곤’의 방어책을 단단하게 쌓아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소음보다 즉흥적이고 자극적이지는 못하나, 천천히 공간과 온도를 지휘하며 몰입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다.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배려 있게 나누는 젊은 커플의 속삭임은 초겨울 햇살 속에서 나의 귀를 따뜻하게 위로하는 순간이었다.
세상의 비폭력 소리를 위하여. 오늘 내 큰 목소리도 한 수위 조절시키자고 마음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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