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제발 좀 움직여라”
설 연휴를 맞아 오랜만에 온가족이 시댁에 갔다. 10살쯤 되니, 할머니댁에 가면 놀거리, 할거리가 통 없나보다. 띵띵땅땅 디지털 피아노 몇 번 치고, 동생과 로봇 만화 조금 보더니 몸이쇼파에 붙어버린 아들. 산책을 가자고 해도, 놀이터를 가자고 해도 반응이 없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못참고 결국 아이와 실랑이가 벌어졌다. 시댁 어르신들 앞에서 그러니 더 민망해서 소리가 커졌다.
다음날 친정으로 가서 그 이야기를 하니 엄마가 대뜸 말하신다.
그렇다. 아이만큼이나 나 역시 어렸을 때 집에서 뒹굴 대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였던 것이다. 엄마가 참다 참다 너무 답답해서 제발 나가 놀라고 등을 떠밀면 겨우 나갔다가도 금세 집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아이들이 주로 하는 고무줄 놀이도, 술래잡기에도 나는 통 흥미가 없었다.
집에 와서 그냥 책 읽으며 뒹굴 대는 게 좋았다. 책 속 세계는 안온하고 평화로웠다. 사실대로 말하면, 아이들과 부대끼는 것을 피하고 싶기도 했다. 술래가 되면 어쩌지 하는 두근거림, 내 차례에 잘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 이런 감정을 들키면 어쩌지 하는 염려 등이 뒤섞여 늘상 아이들과 노는 놀이터보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지는 책장 앞을 택하고야 마는 것이었다.
그런 나야말로, 아이를 가장 잘 이해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나 자신을 들여다보았을 때 마음에 들지 않은 성향을 내 아이가 그대로 빼다박았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이 가장 거슬리는 사람은 바로 나였다. 불쑥 튀어나온 이물질을 빼버리듯, 물위에 뜬 기름만 싹 제거하듯 그 부분만 걷어내고 싶은 마음과 계속 마주하는 것이다.
설 연휴에 지방에서 올라온 이모(아이에게는 이모할머니)가 아이에게 물었다.
“뭐 할때가 제일 좋아?”
아이는 “잘 때“라고 답했단다. 그 이유를 묻자, 아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잘 때는 감정 소모가 없어서 좋아요“ 라고 했다고.
기쁘지도, 슬프지도, 걱정되지도, 설레지도 않는 수면상태가 좋다는 아이의 말을 듣고 한동안 멍했던 것 같다.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걱정도 했다.
그러다 아이가 10살이 될 때까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아기 때부터 내비게이션, CD같은 기계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 한글을 혼자 읽기 시작한 5살부터 가전제품 설명서에 심취했던 아이. 아직도 만화영화의 클라이막스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방과 거실을 왔다갔다 하는 아이.놀이터보다 책과 컴퓨터가 편안한 아이. 완벽하지 않으면 아예 시도를 하지 않는 성향의 아이. 코딩에 관심이 많아 혼자 변수, 블록, 명령어를 이것 저것 바꿔보며 혼자 노는 아이.
그래, 이 아이는 자신만의 세계에 있을 때 가장 자신다운 아이이구나. 책이나 코딩, 레고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안에서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안전할 수 있으니까. 차라리 자는걸 택할만큼, 감정이 부대끼는 것을 힘들어 하는 구나. 내가 글을 쓰고 책을 읽을 때 가장 나답다고 느끼듯 아이도 그런 것이었다. 아이가 아이다움으로 계속 향하는 것은 어찌 보면 관성처럼 당연한 것인데, 나는 그 자연스러운 현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를 너무나 많이 닮은 아이를 보며, 어쩌면 내가 오만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저 아이 마음을 알지, 그러니까 이런게 도움이 될거야. 나도 해봐서 아는데 잘 되려면 이렇게 해야돼. 라는 생각으로 아이에게 이런 저런 조언(을 가장한 잔소리)를 해댔던 것이다. 아이를 번듯하고 예쁜 조형물로 잘 만들어 세상에 전시하려는 마음도 분명 있었을테다. 여러분, 제가 이렇게 아이를 잘 빚어냈어요. 하는 마음.
엄마 10년차가 되어서야, 아이는 내가 빚어내는 조형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설사 아이가 그 뿌리인 엄마와 비슷한 성질을 가졌다 할지라도, 엄마가 아이를 원하는 모양으로 조물락 조물락 만들어낼 수는 없는 거라는 것을.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아이가 자신만의 모양에 가까워지는 동안 지켜봐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가 환경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손 내밀면, 그 때 손잡아주는 정도가 엄마의 역할이다. 나는 나다운 모습을 빚어내며 아이를 기다리자고, 다짐해본다. 언젠가, 너와 내가 각자의 자기다움을 찾아 함께 할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