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가 되기 전에는 서점에 가는 게 소풍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엄마와 함께 서점에 가는 일이 많았다.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영등포 지하상가에 있는 서점이었다.
엄마가 책, 음반을 좋아하셔서 쇼핑을 하고 나면 꼭 음반 가게에 들르고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서만큼은 자유로웠다.
엄마는 주로 어학 코너에서, 나는 어린이 코너에서 책을 보았다.
그렇게 실컷 책 구경을 하고 나면
엄마는 꼭 내가 사고 싶은 책 한 권을 사주셨다.
동네 문방구에서도 책을 사주시곤 했는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오색풍선>이란 동화였다.
항상 엄마와 놀러 가는 날엔 근처 서점에 들렀기 때문에
서점은 곧 나에게 놀이터였다.
슬프게도
서점이 위안의 장소이자 놀이터였던 건
딱 편집자가 되기 전까지의 일이다.
책을 만드는 사람이 된 이후로부터
이제 나는 더 이상 100퍼센트 순수한 독자의 눈으로
책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다.
서점에 가면 한 권 한 권 찬찬히 관찰하며
이 책은 어떻게 기획되었을까를 추적하거나
'나라면 이렇게 했을 텐데'라고 생각하는 시간이 많다.
그 시간은 분명 소중하지만 숨이 막힐 때도 있다.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더 이상 그전처럼 좋아할 수 없는 역설.
직업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출판 편집자는 서점에서 책을 보며 자발적 품평회를 연다.
출판 편집자는 서점에 가면
역시나 자발적 품평회를 벌인다.
- 와, 이 책은 디자인을 이렇게 해서 매대에서 잘 보이게 했네.
- 이건 완전 최근 무슨 책 아류처럼 만들었네.
- 이 저자는 또 책을 냈네. 컨셉이 지난번하고 별 차별성이 없네.
- 와, 이 기획은 기가 막히다. 이 뻔한 주제를 또 이렇게 있어 보이게 만들다니.
등등등.
또한 종이책은 물성을 지녔기에
직접 책을 보고 만져봐야만
얻게 되는 인사이트가 있다.
온라인 서점의 장점은 분야별 책을 스크롤을 내리면서 한눈에 볼 수 있고,
순위에 대한 데이터 등을 얻을 수 있으며
리뷰를 볼 수 있다는 것이지만
책의 물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큰 단점이 있다.
그러다 보니 어떨 땐 온라인 서점에서 본 것과 실물이 많이 달라 놀랄 때가 많다.
이런 시행착오를 줄이는 방법은 독자들이 찍은 실물을 보는 것이다.
그러면 볼륨이나 질감, 제작 사양 등에 대해서
좀 더 실물에 가깝게 느낄 수 있으니까.
책은 반드시 손으로 만지고 잡아보면서
소위 '그립감'을 느껴보는 것도 중요하다.
물성은 그 책의 콘셉트, 기획 취지와 일치되어야 한다.
내용과 형식의 일치, 일관성이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실용적인 지식을 콤팩트하게 엮은 책인데
책을 들었을 때 너무 무겁다면 그 책의 지향점과 물성이 맞지 않는 것이다.
또, 집에서 펼쳐놓고 가족들과 함께 봐야 하는 책인데
잘 펼쳐지지도 않을뿐더러 작은 핸드백 안에 들어가는 크기로 만들어졌다면
목적성에 맞지 않다.
따라서 출판 편집자는 서점에 가면
이렇게 이 책의 목적성 및 컨셉, 즉 '내용'과
물성이란 '형식'이 얼마나 밀착되어 있는지를 살펴본다.
나는 주로 새로운 저자를 발굴하고 기획 아이디어를 얻는 데 집중한다.
출판기획자가 기획을 하는 루트에는 여러 경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기존에 출판되어 있는 책을 통해 기획 아이디어를 얻는 경우다.
이때도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다.
첫째, 어떤 책의 콘셉트에서 인사이트를 얻는 경우.
둘째, 그 책의 저자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한 경우.
이런 발견은 서점을 돌아다니는 내내
매우 분주하게,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다.
베스트셀러 동향 등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대형서점에 가면 매의 눈으로 신간을 살펴보고
일부러 완전히 잊힌 구간에서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책의 무덤'과 같은, 서가 쪽에 빽빽이 꽂힌 책들을 살피기도 한다.
저자분들이 알아야 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물론 이렇게 발굴되는 데는 운도 따라야 하지만
많은 편집자들이 실제 구간을 살피며
새롭게 브랜딩할 저자를 찾기 때문이다.
특히 어떤 주제에 관해 꾸준히 2-3권의 저서를 냈는데
브랜딩이 제대로 되지 않아 실패한 저자가 가장 리브랜딩하기 좋다.
그 저자는 이미 콘텐츠가 있기도 하고
저서를 쓴 경험도 있으며
그동안 책이 잘 팔리지 않았다는 결핍도 있기 때문에
리브랜딩에 대한 욕망이 클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여러 면에서 기획을 하기에 순조롭다.
이제 더 이상 거의 판매되지 않는 구간을
재해석하고 컨셉을 현 시점에 맞게 다시 잡아
새롭게 리뉴얼하는 것도 기획의 한 영역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고 흥미를 느끼는 기획 유형이기도 하다.
오래된 책에 새로운 옷을 입혀주는 일이니까.
사장된 책에 다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는 것이 얼마나 멋진가.
나는 이런 구간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개정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때 가장 큰 희열을 느꼈다.
한때는 이런 품평회 자체를 혼자 즐기기도 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이 또한 숨이 막힐 때가 있다.
그래서 경력이 쌓일수록 중고서점, 헌책방 특유의 파괴된 맥락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편집자는 서점에서 자기가 편집한 책을 보나요?
물론이다.
편집한 책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면
그 책이 어떻게 진열되어 있는지 보고 싶어 가는 일이 많다.
그리고 이건 거의 모든 편집자들에게 해당되는 얘기인데
일종의 강박과 직업병 때문에
자꾸만 책 정리를 한다.ㅋㅋㅋ
특히 띠지가 약간 벗겨져 있으면
그걸 제대로 씌워주기도 한다.
물론 내가 편집한 책은 더 열심히 정리한다.
그래서 나는 농담으로 이런 말을 하곤 한다.
만약 서점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계속 은근 은근 주위를 맴돌고 있다면
그 책을 만든 편집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할 것.
편집자 입장에서는
"제가 그 책의 편집자입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고,
근데 내가 편집한 책을 읽고 있는 독자를 앞에서 보니 너무 영광스럽고 감사할 따름이고
여기서 만약 그 독자분이 책을 집어 카운터로 간다?
올레!!!!!!!!!!!
그리고 때로는 약간의 편법(?)을 쓰기도 한다.
내가 편집한 책을 일부러 열심히 보는 것이다.
(누군가가 열심히 보고 있는 책이 더 궁금한 게 사람 심리 아닌가.)
가끔 베스트셀러 매대에 뜬금없는 책이 올라와 있는 경우가 있는데
물론 일반 독자분이 올려놓고 갔을 수도 있지만....
그 책의 편집자나 그 출판사의 영업자가
이렇게나마 누군가에게 노출되길 바라며
소심하게 놓고 간 것일 수도 있다는 건 안 비밀.
출판 편집자는 서점에 가서 독자들을 관찰하기도 하나요?
물론이다.
서점은 출판 편집자에게는 가장 인사이트를 많이 얻을 수 있는 '현장'이니까.
편집자가 독자와 직접 만날 일은 거의 없다.
그리고 출판사가 독자에 관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다 보니 서점에 가서 직접 관찰을 하며
독자들은 어떤 순서로 책을 읽는지,
유독 많이 집는 책은 무엇인지,
그 책을 집어서 카운터까지 가는지 안 가는지,
한 독자가 여러 분야를 다 돌면서 보는지,
한 분야에만 머물러 있는지
그리고 어떤 카피가 나를 0.3초만에 사로잡았는지
이렇게 나름대로 현장에서 얻은 경험적인 데이터를 쌓아놓는 것도
편집자의 일이다.
이러다 보니 해외로 여행을 가도
서점엔 꼭 방문하고
눈을 부릅뜨고 새롭게 발굴할 책에 없는지 살핀다.
이제는 이런 행위가 거의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지만
가끔 서글플 때도 있다.
온전한 100퍼센트 독자의 눈으로
책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서점은 나에게 놀이터가 아니라
인사이트를 얻는 비즈니스 현장이자
때로는 숨이 막히는 일터가 되었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이 일을 하게 된 순간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된 숙명인 것을.
그래서 가끔은 기획도 하지 말고 그냥 즐기자.
그냥 그냥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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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최면을 걸면서 서점을 돌 때도 있다.
특히 개성 있는 작은 서점이나
맥락이 파괴되어 더 큰 재미를 주는
헌책방에서는 더더욱 즐기고자 노력한다.
서점이 다시 놀이터가 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https://blog.naver.com/eches84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수정하고 보완하여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