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이 내가 꿈꾸는 삶과 어긋나기 시작할 때 생기는 일
처음엔 단순히 지친 줄만 알았다.
10년 동안 워커홀릭처럼 일만 했고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살았으니까.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이 일이 좋으니 평생 일 걱정, 진로 걱정은 없겠다 싶었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올해 내 삶에 찾아온 변화는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상태."
"머리로는 저 좋은 날씨에 나가서 산책을 하고 싶은데 단 한 발짝도 침대에서 나가고 싶지 않은 상태."
"일이 나에게 더 이상 기쁨이 되지 않는 상태."
우울증인가? 번아웃인가?
무기력인가? 지친 걸까?
아니면 말 못하고 견뎌낸 혹독한 결혼생활 때문일까?
'참는 게 미덕'이란 잘못된 신념의 나비효과일까?
비대면 상담으로 알게 된 대면하기 싫은 내면의 상처를 자각해서일까?
그동안 나는 '내가 왜 이럴까'만 수천 번은 생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매번 달랐다.
그러면서, 단순히 어떤 한 가지 원인으로 인한 사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특정한 계기가 없지는 않았다.
이런 사태를 만들게 된 굵직한 사건들이 있긴 했다.
처음엔 그 사건들이 직접적인 원인인 줄 알았다. 그런데 들여다보면 볼수록
그 사건 이전에도 내 삶에는 지각변동이 있었고, 혼란스러웠고,
환멸감과 회의감, 분노, 우울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들을 계속해서 안고 살고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올해부터는 30년 이상 축적해온
그동안의 자아 탐구로 알아낸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가
다 어긋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대혼란에 빠져야만 했다.
그러다, 영화 <식물카페, 온정>을 보고 한 가지 통찰을 얻었다.
내 삶에도 분갈이를 할 때가 온 거구나!
분갈이
분갈이(repotting)는 화분에 심은 풀이나 나무 따위를 다른 화분에 옮겨 심는 것을 뜻한다. 오랫동안 분갈이를 하지 않은 화분은 통풍이 나쁘고 물이 고인 채로 흘러나가지 않아 뿌리가 썩어 식물이 잘 성장하지 못하거나 고사할 수 있다. 따라서 일정한 때가 되면 분갈이를 하여 식물이 잘 자랄 수 있도록 해야 한다._출처ㅣ 위키백과
6년째 임신, 출산과는 상관없이 산부인과를 다녔고, 세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부정출혈이 왔고, 이유 없는 통증까지 느꼈다.
매년 여러 차례 소위 '굴욕의자'에 앉아 검사를 받았다.
그러다 보니 난임, 노산, 고위험군 등등 위험하다는 꼬리표는 다 달려야 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출산 때문에 간 게 아니니까.
나는 산부인과라는 곳을 출산과 상관없이 이렇게 오랫동안 다닐 거라곤 생각도 못했는데.
그것도 앞으로도 계속 다녀야 하는 운명일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다.
결혼 후 6년이 지나도록 아이 소식이 없고
이제 고양이 두 마리까지 키우니
내가 딩크족일 거라고 확신하는 분도 있었다.
전혀 아니다. 나는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내 꿈 중 하나였다.
그 누구보다 아기를 원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생활 역시 순탄치 않았고
중간에 나는 가장 역할도 해야 했으므로 아기를 갖는 건 매번 후순위로 밀려야 했다.
애써 '내 인생에 아기가 없을 수도 있지'라는 생각으로 날 토닥여왔는데,
올해 갑자기 아기를 적극적으로 갖고 싶어졌다.
엄마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그 어떤 때보다 커졌다.
의사가 나는 자연분만에 대한 선택권도 없고,
아기를 갖더라도 무조건 재왕절개를 해야 하는 몸이라고 했던 말도
한때는 상처였다.
그런데 오히려 이제는 내 몸 상태, 자궁 상태, 나팔관 상태 등을
알고 있는 이 상황, 내가 임신하면 위험할 수 있다는 걸 아는 상황,
마지막엔 수술을 반드시 또 해야 함을 아는 상황,
이런 '결정'들이 주는 안정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내가 노력한다고 해서
아기가 내 인생에 찾아오는 건 아니지만,
이제는 커리어우먼이 아닌,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쓰고 싶어졌다.
그렇게 마음이 서고 나니 갑자기 그동안 일 중심으로 다 짜여 있던 내 삶의 기반이
완전히 흔들리는 느낌을 받았다.
현재 나의 일, 사업, 커리어, 라이프스타일은
출산 후의 삶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아기를 갖는 문제 또한 '현재 하는 일이 다져진 후에'
'시스템을 잡은 후에' 로 미뤄졌다.
그런데 바로 이런 생각이 '뭔가를 이룬 후에나 난 아기를 가질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져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조급함, 심적 부담감을 안긴 것 같다.
더구나 나이를 먹어가고
이제 중년의 초입에 다가가게 되니
'청년'의 내가 갖고 있던 생각들이 와장창 무너지는 경험을 하고 있는데
이런 나에게 이전처럼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매일 체험하고 있다.
출판이라는 일은 10년간 나를 지켜주었지만,
앞으로의 10년과는 맞지 않다는 걸 이제야 인정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출판 편집자라는 일이 육아를 하면서도 하기 좋은 일이라고 널리 알려진 건 사실이니까.
그러나 내가 겪은 이 세계는 앞으로 살고 싶은 삶,
나의 정서적/체력적인 변화, 나란 사람의 특수성과는 맞지 않다는 걸 이젠 확신할 수 있다.
더구나 직장을 다닌 시간보다 프리랜서, 사업을 한 시간이 더 길어진 지금 시점에서는
(예비)엄마로서의 나를 오히려 제로베이스에서 다시 생각하는 게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일보다 더 많은 게 중요해져버렸다.
한마디로, 다시 뿌리내릴 화분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사실 요양 차 지방으로 내려갈까 하는 생각에
휴가 기간 동안 남쪽으로 내려가 남편과 부동산을 보러 다니기도 했다.
그러다 부동산을 보는 일이 거의 집착에 가까워져서
나는 3개월 가까이 매일 인터넷으로 300개가 넘는 매물을 보았고,
매일 부동산 관련 유튜브를 보았으며,
실제로 매물을 보러간 일도 허다하고,
이제 내가 사는 동네와 근처 부동산은 거의 꿸 정도가 되었다.
정확히는 매물을 찾는다기보단
삶의 터전을 완전히 뒤바꿔버리고 싶을 정도로
지금 나를 담고 있는 이 화분이 너무 답답하고 벅찼던 것이다.
부동산에 대한 집착은 분갈이를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
내가 어떤 환경 속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탐구였다고 생각한다.
한때는 책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가 30시간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나는 24시간을
보통의 사람처럼 지내고 싶어졌을 뿐이다.
일과 삶을 분리하고 싶어졌고
좋은 엄마, 아내가 되는 것도 상당히 가치 있는 일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쌓아온 경력을 가지고
다른 일을 하고 싶어졌으며
앞으로 2년은 엄마가 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그 후의 삶, 중년을 대비하는 과정이 될 것 같다.
진짜 사랑했던 일도 그만둘 수 있다.
그 일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 일이 더 이상 내가 살고 싶은 삶과 맞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