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덕한지 20여년이 되어도 아무튼 뉴비
누군가 취미를 묻는 질문에, 야구 좋아한다고 하면 꼭 따라오는 물음이 있다.
"야구 본지 얼마나 되셨어요?"
책 읽어요, 넷플릭스 봐요, 할 때는 나오지 않던 질문이 야구를 본다는 말에는 꼭 꼬리를 물었다.
어디 팬이예요? 언제부터 야구 봤어요? 선수 누구 좋아해요?
마치 진짜 야구 팬과 가짜 야구팬을 가려보겠다는 듯이.
나는 이를테면 자연발생 된 야빠였다.
남들은 죄다 부모님이 데려가 준 야구장에서, 애인과 함께 간 데이트에서, 아니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야구장에서 뜯는 치킨맛이 그리 좋아 야빠가 된다고 구전설화처럼 내려오던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주변에는 나를 야구장으로 이끌어줄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친구들은 공놀이보다 아이돌에 열광했던 10대였고, 우리집 남자들은 아빠고 남동생이고 죄다 스포츠에 무관심했다. 그 안에서 자란 나 역시 야구보다 발야구가 익숙한 10대였다.
그렇게 시간은 순조롭게 흘렀고, 2008년이 되었다.
2008년. 야구 팬들은 이 년도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뜨끈하게 차오를 것이다. 마치 축구 팬들이 아직도 2002년을 떠올리면 대-한민국을 소리 높여 외치고 싶어지듯이.
아무튼 2008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베이징 올림픽이 열렸고, 한국이 최초로 야구로 금메달을 땄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경기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야구에 입덕을 했구나! 싶을 수도 있는데 그건 아니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누가 홈런을 쳤는지, 누가 호투를 했는지, 그런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까지도 생생한 장면이 딱 하나있다. 결승 쿠바전에서 심판의 판정에 항의(*항의가 아니라 단순 물음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하던 포수가 퇴장당하는 모습이었는데, 덕아웃으로 들어가던 그가 들고 있던 글러브를 힘껏 패대기 쳤다. 그 순간, 내 마음 속에는 그래 저거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 누가봐도 편파판정이었고, 그에 승복하고 얌전히 내려갔다면 나 역시 마음 속으로 우우 심판에게 약간의 야유를 보내는 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패대기치는 글러브를 보는 순간 암, 응당 스포츠 선수라면 저정도 패기와 승부욕은 있어야지! 싶었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악바리 정신으로 악으로 깡으로 승부하는 선수들이 좋다.
다들 알다시피 그 포수는 강민호였다. (당시) 롯데 자이언츠의 안방마님이자 프랜차이즈 스타 강민호.
그리고 내가 태어나고 살고 있던 곳이 바로 롯데 자이언츠의 도시 부산이었다. 그렇다, 나는 그 장면하나로 야구에 입덕, 아니 롯데 자이언츠에 입덕하게 되었다.
아니, 베이징 올림픽에 강민호랑 이대호가 있었다니까?
베이징 올림픽에서 이대호가 내 심장에 홈런을 날리고 강민호가 내 가슴에 글러브를 던졌다고. 이건 솔직히 불가항력이었다고 본다.
그렇게 입덕을 했더니 때마침 이 시기의 롯데가 정말 재밌는 야구를 하고 있던 때였다. 다름 아닌 제리 로이스터 감독 체제였던 때니까. 이 때 부산 사람들은 전부 야구를 봤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자습시간에 야구를 틀어줬고, 하교하고 간 공부방에서도 야구가 틀어져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 아무나 붙잡고 오늘 롯데 야구 이겼나요? 물어보면 남녀노소 불구하고 스코어까지 답해줄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나 야구 좀 안다면서 부산 사람들한테 로이스터 시절 야구봤다는 소리를 한다면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야, 그때 야구 안 본 부산 사람이 어딨어?
아무튼 로이스터 시절의 롯데는 정말 맛깔나게 야구를 했다. '홍대갈(홍성흔-이대호-가르시아)'로 불리던 클린업을 필두로 거를 타선이 없었던 닥공 야구.
야구가 아무리 투수놀음이라 해도 점수나는데 재미없어 할 사람 있나?
그때는 정말 홈런도 많이 치고 점수도 많이 내줬다. 매년 가을에도 야구를 해줬다. (지금은 가을에 야구하는 법을 단체로 잊은 것 같다. 나도 잊었다. 야구를 가을에도 했던가?)
나는 야구가 늘 그런 줄 알았지. 이게 고점 매수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풀매수 한 것이다.
내가 롯데팬이라는 이야기를 하면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로이스터 때 롯데 야구 재밌었죠'라는 소리를 한다. 로이스터 이후로 스쳐 지나간 감독이 지금 한 손가락을 넘어 두 손가락을 꽉 채우게 생겼는데! 만약 그 시절 로이스터가 우승까지 시켰더라면, 최초의 외국인 부산 시장이 탄생했을 거라고 한치의 과장없이 이야기할 수 있다.
여러분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보고 입덕한 야빠들을 베이징 뉴비라고 부르는 사실을 아는가? 내가 바로 그 베이징 뉴비였던 것이다. 이제 베이징 올림픽이 끝난지도 20여년 가까이 지났지만, 아무튼 나는 아직도 (어쩌면 영원히) 베이징 뉴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