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글의 잔인한 질문 모음집
고백하건데 나는 아직 혼자 직관을 가 본적이 없다.
일 년 144경기 중에 144경기를 다 보고
(물론 이기면 여기에 하이라이트도 봐야하고 구단 유튜브에서 올려주는 영상도 봐야한다)
전국을 쏘다니며 직관도 다니지만, 혼자 야구를 보러 간 적은 없다.
가족이든 애인이든 아니면 야구의 '야'자도 모르는 머글 친구라도 데리고 가야 직성이 풀렸다.
"야구 선수? 몰라도 돼, 그라운드에서 유니폼 입고 뛰면 다 야구 선수야.
야구 룰? 몰라도 돼, 점수나면 사람들 일어나서 소리쳐.
야구장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게? 유니폼이랑 응원도구 다 빌려줄게. 몸만 오면 돼 너는."
온갖 감언이설과 먹을 것으로 꼬셔서 일단 알겠다는 대답만 받아내면 그 뒤는 일사천리였다. 구단 응원가 모음집 유튜브 링크를 던져주고는 반복 재생해서 듣고 오라고 하는 거다. 아냐아냐 꼭 외우지는 않아도 돼~ 근데 알면 더 재밌긴 하다?
아무튼 내가 야구에 미쳐있는 것과 달리 내 친구들은 대부분 야구가 그래서 몇 명이서 뛰는 게임인지도 모르다보니 귀엽고 속 터지는 질문들을 자주한다. 투수랑 포수랑 같은 팀이라는 걸 모르는 건 이제 놀랍지 않다. 수비 때도 일어나서 같이 응원하면 안 되냐고 묻는 친구도 있었다.
어느 쪽 자리에 앉고 싶냐는 질문에 어차피 전광판으로 틀어주니까 뒷자리도 상관없다던 친구의 대답에
"이건 콘서트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전광판에 나오는 건 선수 프로필밖에 없다고!
그래도 이런 질문들은 귀엽다. 내가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이런 거다.
"오늘 야구보러가면 몇시에 끝나?"
이제 이러면 내 목소리가 작아진다. 응 보통 야구는 3시간에서 3시간 반 정도 하는데...
그런데...기가막힌(P) 투수전이 펼쳐지면 2시간 반컷도 가능하고 기가막힌(N) 타격전이 펼쳐지면 이제 언제 끝날지는 허구연 총재님도 몰라.
(실제로 롯데 자이언츠는 무박 2일 경기를 펼친 적이 있으며, KBO 10개 구단 중에서도 매번 최장 경기시간을 갈아치운다.)
그러면 이제 나는 수련관 교관처럼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선수들이 하는 꼬라지에 따라
야구는 2시간 반이 될 수도 5시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곤란한 질문이 또 하나 있다.
"선발 투수는 몇 이닝이나 던지고 내려가?"
이건 정말 롯데 팬에게 잔인한 질문이다. 이 질문을 받으면 말문이 턱하고 막힌다. 최근 몇 년간 롯데 자이언츠는 제대로 된 선발진 구축이란 걸 해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선발이면 최소 5이닝 이상을 던져주는 게 맞긴하거든? (사실 나는 선발이 6이닝은 먹어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꾸 말이 길어진다. 쟤는 요새 컨디션이 난조라, 얘는 유독 이 상대 팀한테 약한 선수라, 걔는 사실 5선발도 아니고 대체 선발이라...
이렇게 숱한 머글 친구들을 데리고 다니다 보니 이제 야구룰 설명하는데는 도가 텄다. 일단 야구는 '공격'과 '수비'를 번갈아하는데 말야... 공수교대 시점과 볼카운트 보는 법, 홈런과 파울홈런이 뭐가 다른지까지 가르치는 건 이제 녹음 안내멘트보다도 더 빠르고 정확하게 읊을 수 있다. 만나서 가르쳐줄 시간이 없으면 영상통화를 켜놓고 가르치기도 한다. 저스트원 텐미닛? 아니 나는 파이브 미닛이면 야알못도 3시간 야구보게 만들기 쌉가능이다.
이제 이렇게 머글들을 야구장에 끌고 갔으니, 선발 투수의 기가막힌 호투와 타자들의 안타 홈런 오오오가 쏟아지며 야구가 이렇게 재밌는 거구나하고 보여주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인생도 내 맘대로 안되고 야구는 더 마음대로 안 돼서 꼭 이런 날마다 헛웃음 나는 경기력을 보여주곤 한다.
2이닝만에 내려가는 선발투수라던지 (너 오프너로 나왔어? 네가 위장선발이야? 같은 팀까지 속이는 위장력 미쳤다.) 응원가가 끝나기도 전에 초구딱치고 내려가는 테이블세터와 뜬-뜬-땅-땅 노래라도 부르나 싶은 중심타선까지 보고 나면 내가 오늘 무슨 부귀 영화를 누리자고 여기까지 기어 나왔지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외에도 역전에 재역전에 재재역전에 정신나갈 것 같은 경기가 결국 우리 팀의 패배로 끝나는 경우도 있다. 직관 간 친구의 입장에서야 0:1 이런 점수 안 나는 투수전보다는 재밌겠지만, 내 입장에서는 연장을 가서라도! 무승부를 해서라도! 하다못해 볼넷 끝내기 이런 경기를 하더라도 지는 것보다는 낫다고 머리를 쥐뜯게 되기 마련이다. 물론 내 친구들은 순수하다 못해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래도 졌잘싸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