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미 Aug 30. 2023

미우나 고우나 나의 커리어


1년 전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글쓰기 주제는 변함없이 '나'였다. 나라는 존재는 한결같지만 생각은 매일 매 순간 달랐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이 또한 글을 썼기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처럼 매일 나를 바라보고 쓰는 글은 차곡차곡 쌓여 현재의 나를 증명하는 기록이 되었다. 기록 안에는 과거-현재-미래의 내가 오롯이 녹아 있다.


1년 전 쓰다 만 이력서를 꺼냈다. 지난 10년을 찬찬히 돌아보았다.





2009년 6월 15일 입사 후 2010년 12월까지 1년 6개월 동안은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는 기간이었다. 웹사이트 디자인만 하다가 스마트폰 앱과 대시보드 UI 디자인을 하려니 어려움이 많았다. 모르는 것을 가르쳐 줄 사수가 없었기에 배움은 외부에서 얻어야 했다. UI 관련 지식을 얻고자 7일간의 UX/UI 디자인 아카데미를 신청하고 사무실 대신 강의장으로 출근 허락을 받았다. 업무 관련 도서도 큰 제약 없이 지원받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과의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사회생활 3년 차의 주니어에겐 이 여건이 꽤 괜찮아 보였다. 디자인 팀이 없고 사수가 없다는 단점은 잠시 묻어둘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딱 여기까지였다. 성장하기 위해 책을 읽고 강의를 들어도 혼자서 할 수 있는 건 매우 제한적이었다. 배워 온 것을 실행해 볼 수 있는 환경이 없었고 같은 일을 하는 이가 없으니 생각을 나눠볼 기회가 없었다. 다양한 디자인 경험을 한 것은 좋았으나 내세울 만한 결과물이 없었다. 1년 6개월 동안 어떻게 성장했는지 알 수 없었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성장을 위해서는 이직을 해야 한다는 생각만 할 뿐 행동하지 못했다. 다시 웹에이전시를 갈지 다른 IT 회사를 갈지,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결정을 못했기 때문이다. 결정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영부영 시간이 흘러 2011년이 됐다.


2011년 2월 15일, 이직을 미루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운명의 남자를 만난 것이다. 이직은 모르겠고 연애나 할래 모드랄까. 그 해 봄엔 회사가 좀 더 큰 사무실을 구해 이사를 했다. 규모가 커지고 인원이 늘어났지만 디자이너 충원은 없었다. 대신 솔루션 1팀에서 기획/관리 팀으로 이동했다. 디자인과 경영지원 각 1명씩 팀원은 2명이고 팀장은 없다. 서운함을 표시하는 내게 대표는 조직도는 신경 쓸 필요 없다고 했다. 디자이너 충원은 추후에 논의하자고 했다. 서운함을 곱씹을 겨를도 없이 새로운 일이 들이닥쳤다. 자체 솔루션 홍보를 위해 전시회에 참가하게 됐으니 브로슈어와 홍보용 배너 제작을 해야 한다는 미션이었다.

날벼락같은 업무 지시에 당황스러웠으나 해야 할 일이니까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혼자 감당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업무를 지시한 상사에게 외주를 주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결과는 OK, 외주 작업에 필요한 결제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이후 나는 혼자서 인쇄소 섭외, 스케줄 짜기, 디자인 작업에 필요한 원고 요청, 출력 디자인에 필요한 에셋 전달, 디자인 시안 감수, 인쇄소 방문 후 샘플 테스트까지 소화했다. 일정에 차질 없이 일을 마쳤다는 뿌듯함을 느꼈다. 처음 하는 일인데도 잘 해냈다는 칭찬에 잠시 으쓱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 한편에는 '이게 맞나? 이대로 괜찮을까? 이직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해 8월 결혼을 하기 전까지 말이다.


웹에이전시를 다니며 친해진 언니들과 대화를 나누다 결혼 후 이직한 경험에 대해 듣게 됐다. 면접장에서 기혼 여성이 듣는 질문은 '아이를 언제 낳을 거냐'였고, '야근을 할 수 있겠냐', '아이 키우면서 업무에 소홀하면 어떻게 하냐' 등 굉장히 노골적이고 무례한 것들이었다. 나는 이런 면접장에서 온전한 정신으로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결혼과 동시에 5개월 뒤에 태어날 아이를 키울 고민도 해야 했던 터라 이직 생각은 사치였다. 회사에서는 결혼도 출산도 내가 처음이라 전례가 없었기에 임신 7개월이 넘도록 말도 못 하고 회사를 다녔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대표 님은 망설임 없이 육아휴직 제도 관련 문서를 건네셨고, 휴직 기간을 1년 모두 쓰고 싶다는 의견도 받아주셨다. 다음 날 정규직 디자이너 채용 공고가 올라갔고 휴직 전에 채용이 마무리되어 인수인계를 하고 자리를 비울 수 있었다.


2013년 4월 1일, 산전 후 출산휴가를 포함한 1년 3개월의 육아 휴직 기간을 마치고 복직을 했다. 아쉽게도 내가 없는 기간 동안 일을 한 디자이너는 개인 사정으로 인해 퇴사를 한다고 했다. 드디어 디자인 팀이 생기겠구나 싶었는데 무산되어 조금 아쉬웠다. 전업 엄마에서 일하는 엄마로의 전환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다시 신입사원이 된 마음가짐으로 일을 했다. 일이 손에 익어 다시금 이직에 대한 고민이 고개를 들려고 할 때, 둘째를 임신했다. 두 번째 육아 휴직을 기점으로 이직 생각은 접고 '이 회사에 뼈를 묻어야겠다'라고 다짐했다.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디자이너가 될지에 대한 고민보다 연애에 더 열정을 쏟으며 20대를 보냈다. 그 덕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했고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었다. 그렇게 30대를 맞이했다.


둘째를 낳고 복직 한 2016년은 아이폰 1세대가 불러온 모바일 혁명으로 인해 웹 환경이 이전과 매우 다르게 변해버린 후였다. 밀린 디자인 업무를 진행하기도 바쁜데 바뀐 웹 환경에 적응하려니 배워야 할 것도 많았다. 열 권이 넘는 책을 구입하여 읽고 업무에 필요한 강의와 세미나는 모두 찾아들었다. 

두 달이 지났을 무렵 긴박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생겼다. 10일 내로 만들어지지 않은 사이트를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사이트처럼 보이게 모든 페이지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최소 20페이지에서 최대 30페이지까지 되는 분량이었다. 알바를 쓰던 뭐든 필요한 것은 다 지원할 테니 기간 내에 완료해야 한다고 했다. 막막했다. 인쇄물처럼 외주를 주기도 어려운 일인 데다가 사용 중인 PC 사양으로는 10일 안에 일을 마치기 어려웠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도구를 바꾸는 것이었다. 대표님께 스케치 사용을 위한 아이맥을 구입해 달라 요청했다. 아이맥이 생기고 포토샵에서 스케치로 디자인 도구를 바꾸면서 업무 효율은 이전에 비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이번에도 일정에 차질 없이 일을 마칠 수 있었다.


그동안 외주 프로젝트 회의에는 참석한 경우가 없었는데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이사 님이 참석 인원에 나를 넣으셨다. 처음 가는 외부 회의라 당황했고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엉성한 탓에 상대에게 휘둘리고 말았다. 이후 계속된 회의로 조금은 나아지긴 했지만 하고 싶은 프로젝트가 아닌 데다가 업무 시간을 잡아먹는 회의가 싫어서 이사 님께 앞으로의 회의에서 제외해 달라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이사 님은 "회의 참석은 성장할 기회인데, 그럴 생각이 없는 건가?" 하고 물으셨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당시 회사는 이사와 대표가 추구하는 사업의 방향이 달랐다. 두 사업을 모두 겪어 본 결과, 이사가 이끄는 사업보다 대표가 이끄는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성장하는 길이라 여겼다. 대표는 1년 전 자사 솔루션의 글로벌 진출을 위해 미국 실리콘 밸리에 지사를 설립한 상태였다. 덕분에 글로벌 웹사이트를 제작하고 모바일과 데스크톱 대시보드 UI 디자인을 할 기회가 생겼다. 홍보를 위한 마케팅 콘텐츠 디자인도 하고 전시 참가에 필요한 브로슈어와 배너 제작도 했다. 매 순간 해보지 않은 일을 하느라 어렵기도 하고 힘든 경우가 많았지만 함께 고민을 나눌 마케터가 있었고 나의 욕구와 맞는 일을 했기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사회생활을 통틀어 가장 역동적으로 즐겁고 심적으로 안정적인 시간을 보냈다. 근속 10주년을 마주하기 전까지 말이다.


2019년 6월 15일은 근속 1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어제와 다를 것이 없는 하루인데 나의 마음이 달라졌다. 10년이란 세월의 무게감이 느껴지면서 앞으로 내가 얼마나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미국 지사 설립 이후 3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그럴듯한 수익원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마지막엔 미끄러져버리기 일쑤였고 이런 일이 반복될수록 희망에 부풀었던 마음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드디어 하고 싶은 일을 찾은 것 같았는데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일은 회사에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정말 하기 싫었던 이사가 이끄는 사업에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10년 전 야심에 부풀었던 대표와 이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젊었을 적의 자신감과 무엇이든 해내고 말겠다던 포부를 가졌던 그들은 회사와 함께 나이가 들었고 이제 모험보다는 안전을 택하게 됐다. 사업을 일으키고 직원을 고용하여 그들의 생계를 책임진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용주로서 이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무수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의무를 한 번도 저버린 적이 없었다. 회사는 이미 노선을 정했으니 나의 선택만 남았다.




남아서 따를 것인가 아니면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날 것인가.



사진: UnsplashHadija



매거진의 이전글 모두 다 글쓰기 덕분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