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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미 Jun 23. 2022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고마운 일

플러스 사고방식으로 아이를 대해보자.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는 건강하게 태어나기만을 바랐다. 아이가 태어나고 이따금 아플 때면 너무 안쓰러워서 그저 건강하기만 해달라고 했다. 육아서에 나오는 발달에 맞게 크지 않을 때는 조바심도 났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어리니까 충분히 나아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나니 아이에게 바라는 것이 점점 많아졌다.

"네가 형이니까, 동생을 챙겨야지"

"넌 나이가 몇 살인데 아직도 이게 서투르니?"

"맨날 그것만 하면 어떡해? 다른 것도 좀 해봐."

"너 나중에 학년 더 올라가면 지금 안 한 거 후회할 거야”

"넌 왜 동생이 돼서 형한테 개기니?"

"초등학생이 너무 애기처럼 굴지 말랬지

"제발 좀 조용히 얌전히 좀 있으라고 했잖아."

"둘이 계속 싸우면 집에서 쫓아낼 거야!"

"엄마 좀 그만 괴롭히고 너희들끼리 놀아 좀!"

늘 하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입에서 종종 나오는 레퍼토리다. 아이들을 대할 때 무의식적으로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어린 내가 튀어나온다. '나는 너희 나이 때 이런 경험 못했는데. 내 부모님은 너무 바빠서 나 혼자였는데. 나는 혼자 다 잘했는데. 다 참았는데. 꾹꾹 참고 잘했는데. 동생도 챙겨야 했고 말 잘 듣는 딸로 컸는데. 너희는 왜 그렇게 참을성이 없어? 왜 늘 서툴러? 왜 그렇게 못났어? 네가 그러니까 자꾸 못났던 내가 떠오르잖아. 너희들 너무 싫어. 아니, 내가 너무 싫어.' 아직도 내 안에 머물러 있는 내면의 어린아이가 내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속에 함께 살아간다. 언제쯤 이 내면의 아이와 헤어질 수 있을까.


아이들과 함께 하다가 내가 주로 욱하는 순간은 내 안에서 아이들을 향해 무언가를 바라고 있을 때가 대부분이다. 기대하고 있는 것이 있다는 건 그만큼 실망할 거리가 크다는 것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것을 아이들에게 줄 때 묘한 질투를 느끼기도 한다. 이 질투는 아마도 내면의 어린아이일테지. 알고 있기에 조심하려고 하는데 완벽하게 안된다. 근본적인 해결이 필요한 거겠지. 심호흡을 하고 어제 읽던 책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를 읽었다.


살아 있다는 것을 0으로 치고 뭐든지 플러스로 생각해 더하는 방식으로 아이를 보면 아이가 살아 있는 것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게 공헌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어떤 아이에게도 용기를 주는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엄마가 믿는 만큼 크는 아이> 기시미 이치로 - p.145


이 책은 아들러 육아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늘 읽은 내용 중에서 선택한 문장은 아이의 행동이 아닌 존재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여줘야 아이도 자기 자신을 수용하는 법을 배운다는 거다. 자기 수용은 나의 못난 부분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잘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잘하려고 노력하는 건 고치는 것과 다르다. 사람에게 '고치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유독 내가 '고치다, 고쳐줘라'는 말에 예민하고 울컥한다는 걸 오늘 확실하게 인지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아이들에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첫째에게 자주 하지 않았을까 돌이켜보게 됐다. 내 어린 시절을 자꾸 떠오르게 하는 아이를 보며 다른 인격체임을 알면서도 자꾸만 내 안의 어린아이와 동일시하게 된다. 그때 내가 그러지 않았었다면... 하는 후회를 첫째에게서 보상받으려는 건 아닐까. 내 어린 시절과 같은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같은 경험을 하게끔 내가 몰아붙인 적은 없었을까.


그래도 다행인 건, 첫째는 끊임없이 자기표현을 하려고 한다는 거다. 서툴지만 그래도 표현하려고 한다는 것이 긍정적이다. 그래그래 어뜨케 저뜨케 살아보자.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너도 사는 게 처음이라서 서툰 건 당연하니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먼 미래의 불안에 사로잡히지 말고 지금 이 순간 아이들과의 시간에 집중하며 살아보자.

오늘은 다른 형태의 대화를 시도했다.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겠다고 요청한 첫째에게 계란물을 직접 풀어보라고 포크를 건네줬다. 서툰 솜씨로 휘적휘적 대충 저으며 하던 말을 더듬거리는 아이를 보니 웃음이 났다. 이제 그만 됐다고 포크를 받아오며 하던 말 마저 하라고 했다. 아이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은 이야기(내 입장에서)를 후룩하고 자리를 떠났다. 평소 같으면 중요한 말 아니면 아침에 바쁘니까 말 걸지 말라고 했었을 텐데 오늘은 그냥 듣고 말았다.

그냥 네가 바람처럼 조잘거리고 사라지는 모습이 감사하다. 토스트가 언제 되냐고 기웃거리는 모습도 웃기다. 학교 갈 준비 해야 하는데 지들끼리 떠드는 모습이 눈엣가시 같지만 시간만 체크해주고 말았다. 그러다 마지막에 딱 한 번 언성을 높였다. 다른 날이면 최소 5번 이상은 목청이 커졌을 텐데-



이미지 출처

https://pixabay.com/users/Public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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