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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May 27. 2015

고백

시를 쓰고 싶어요, 정말 쓰고 싶어요

내 이야기를 적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은데, 나는 소위 ‘인 서울’ 대학 출신도 아니고, 부잣집 아들도 아니니까, 음… 그래서 조금은 의미가 있지 않으려나? 어찌됐건 지금은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한다. 신춘문예로 등단해 시인이 됐고, 패션 잡지에서 기자로 일한다. 학생들에게 글쓰기도 가르친다. 오만한 일이지. 내 글도 제대로 못 쓰면서. 유명 대학 못 나와서 기죽은 사람들, 부잣집 자식이 아니어서 슬픈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이 글을 쓴다.  


나는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유명 대학을 나오진 못했다. 전공은 국어국문학이다. 공부는… 시를 썼다. 1999년 3월 인문대 앞 잔디밭에 둘러 앉아 신입생들이 자기소개를 했는데, 내 차례가 왔다. 

저는 이우성이고, 재수는 안 했고, 꿈은 시인입니다. 

당당했다. 생각 없이 한 말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약간 웃었던 것 같다. 꿈이 시인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보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니까. 그때부터 내 꿈은 시인이 되었다. 그런데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왜 해야 하는 거지? 알 리가 없었고, 궁금하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좀 덜 똑똑하고 튀는 걸 좋아하는 스무 살 남자 애였다. 


며칠 뒤, 낮부터 술을 마신 선배 한 명이 나를 부르더니 교수님 연구실에 끌고 갔다. 거기 한 선생님이 계셨다. 선배 누나도 네 명 있었다. “선생님, 틈에 새로 들어올 신입생입니다. 꿈이 시인이래요.” 그랬구나, 내 꿈이 시인이었구나. 그렇게 나는 틈이라는 시창작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다. 좋아하는 예쁜 여자 동기생은 잔디밭에서 남학생들이랑 놀고 있는데, 나는 시를, 읽고 쓰고, 혼나고… 이러하였다. 친한 동기들은 스타크래프트를 하러 갔다. 


그렇게 봄이 다 갈 보낼 무렵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시인을 한 명 만들고 싶어서, 글재주 있는 제자들을 보면 불러다 밥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시 써보자, 설득을 했지, 그런데 다들 도망을 가버렸어.” 나는 속으로 대답했다. ‘선생님, 저는 도망 안 가요. 걱정 마세요. 제가 시인이 돼서 꿈을 이뤄드릴게요.’ 왜 그랬을까? 

    

우리 학교에선 시인이 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때 이미 알았지만 나는 재능이 없었다. 선생님도 ‘아니, 신입생이라고 들어온 게 왜 저 모양이야’라고 생각하셨을 거다. 하지만 선생님은 항상 이렇게 말씀해주셨다. 

한 가지 일을 10년 동안 열심히 하면 누구나 잘 할 수 있단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새기며 열심히 시를 썼다. 그렇게 10년만 하면 된다고 선생님이 말씀하셨으니까. 하지만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돼도, 나는 못할 것 같았다. 나는 그걸 알았지만 썼다. 쓸 수밖에 없잖아.

    

나는 늘 울었다. 시를 너무 못 써서. 밤에 아무도 없는 학교에 남아서 잔디밭에 앉아서 울고, 인문대에서 기숙사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아서 울고, 서서 울고, 앉아서 울고.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신입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걔들이 금방 나보다 잘 쓰게 되었다. 나는 선배인데 걔들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군대에 갔다. 군대에 가서 선생님께 편지를 보냈다. ‘선생님, 군대에 와서도 늘 시를 생각해요. 계급이 낮아서 책도 볼 수 없고, 시도 쓸 수 없지만 시를 생각해요.’ 선생님이 나를 잊을까봐 무서웠다. 도망가지 않고 아직 시를 품고 있는 제자가 여기 있다고 선생님께 알려드리고 싶었다. 선생님에게서 답장이 왔다. 내용은 기억이 안 나는데, 새로 쓴 시를 한 편 보내주셨다. 그 시를 군복 앞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화장실에 갈 때마다 읽었다. 무슨 뜻인지 이해도 못하면서.


학교로 돌아온 후에도 계속 시를 썼다. 동기들이 취업 때문에 걱정할 때도 시를 썼다. 취업 준비를 안 하니까 취업에 대한 걱정이 별로 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토익이나 토플 시험을 본 적도 없다. 바보였던 걸까? 시인이 되지 못했는데 졸업을 했다. 


우연히 잡지사에서 기자를 뽑는다는 공고를 봤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이력서에는 적은 게 ‘시 창작 활동을 열심히 했습니다’ 밖에 없었다.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갔더니 나 말고 두 명이 더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둘 다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을 나왔다. 면접을 마치고 나와서 주변을 둘러보니 거기가 강남이라는 곳이었다. 청담역. 강북에서만 산 내가 처음으로 강남에 간 날이었던 것이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기가 울렸다. 출근을 하라고 했다. 3개월 인턴을 하고 정식 기자가 될지 다시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는 당장이라도 회사로 올라가서 일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말했다. 


그런데 내가 왜 뽑혔지? 나중에 편집장님이 말해주셨다. “자기소개서 보니까 마라톤도 뛰고, 자전거 타고 전국 일주도 했던데. 기자는 버티는 직업이니까 끈기 있는 사람을 뽑아야지.”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뛰고, 자전거 타고 15일 동안 대한민국을 돌아다녀서 기자가 됐다. 


기자가 됐다고 다 기사를 쓰는 건 아니다. 정수기 통에 넣을 물 나르기, 물류 창고에서 온 책 옮기기, 사무실 청소하기, 퀵 서비스로 배달된 물건 정리하기, 전화 받기, 밥시키기, 빈 그릇 치우기 등이 주 업무였다. 하지만 3개월 동안 내가 한 일 중 가장 혁혁한 공은 에어컨을 고친 것이다. 5월이었다. 날이 갑자기 더워진 데다, 기사 마감 때여서 선배들이 예민해져 있었다. AS센터에 전화를 걸었더니 너무 바빠서 그날은 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의자를 밟고 올라가 천장에 달린 에어컨 뚜껑을 열었다. 봐도 아무것도 모르는데 고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개월 후에 정식 기자가 되지 않으면 정말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치고 싶었다, 정말 고치고 싶었다. 그런데 에어컨에서 갑자기 바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뭘 어떻게 한 거지? 사람들이 나를 칭찬해주었다. 내가 잘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걸 잘 하려고 회사에 출근하는 건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출근할 때마다 “오늘도 늦게 와야 돼.”라고 말했다. 일찍 오지 말고 늦게까지 남아서 더 열심히 일하고 오라는 의미였다. 나는 유명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니까. 그리고 나는 ‘IMF’ 그러니까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 대학생이 됐으니까. 

    

일을 하다가 종종 옥상에 올라가서 강남의 높고 화려한 건물들을 보았다. 기자가 되겠다고 이력서를 낸 건 계속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글을 써야 시도 계속 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죽어야겠다고 마음먹진 않았지만,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죽는 게 딱히 힘든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살고 싶었다. 내가 잘났다는 생각은 절대 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이렇게 멍청한 애가 멍청하게 삶을 마감하는 건, 해도 해도 너무 멍청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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