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싫어서>가 애국소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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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강명은 소설가다. 2011년 <표백>이란 작품으로 한겨레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고 하는데, 안 읽어봤다. 관심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날 장강명이 상금을 휩쓸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금을 휩쓰니까 소설가들 사이에서 장강명이란 이름이 회자되기 시작했다. 나도 그가 궁금해졌다. 역시 돈의 힘이란! 그러다가 올해 문학동네작가상까지 받은 것이다. 상은 곧 상금이다.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한 후에 생각을 해봤어요. 소설을 써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두 가지가 생각나더라고요. 하나는 <7년의 밤>을 쓴 정유정 소설가처럼 한 방 크게 터뜨리는 거고, 다른 하나는 문학상이나 공모전에 작품을 보내서 상금을 받는 거죠."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나? 당연한 거 아닌가. 전업 작가는 직업이 소설가인데, 소설을 써서 돈을 벌어야지. 장강명은 소위 '뜬' 후에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의아해했다. 소설가가 그런 말을 해도 돼? 예술가가? 라는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왜 돈을 벌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한 작가의 예술성이 훼손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작가는, 좋은 작가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의 예술성을 지키려고 한다. 내가 작가라서 옹호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상을 탈 줄은 몰랐죠. 심사하신 분들이 제 작품을 좋게 봐주셨는데, 운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쓰고 있는 이야기가 심사하신 분들에겐 새롭게 느껴졌나 봐요."
제주4·3평화문학상을 받은 <2세대 댓글부대>는 '일베'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에 관한 이야기다.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표백>은 한국 사회에서 젊은이들은 도대체 할 일이 없으니까 자살하겠다는 이야기다. 장강명 소설 중 가장 많이 팔렸고 올해 여러 문학상 본심에 올라간 <한국이 싫어서>는 말 그대로 한국이 싫어서 부모도 있고 애인도 있는 젊은 여자가 이민 가서 생활하는 이야기다. 굉장하지 않은가? 현실의 이야기론 새롭지 않지만 소설의 이야기론 새롭다. 하긴 요즘은 현실이 더 소설 같다. 비로소 소설이 현실을 따라가는 건가, 라는 이상한 생각마저 든다.
"그런데 저는 한국을 싫어하지 않아요. 한국 사회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고요. 한국이 절망적인 땅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이민을 가는 게 해결책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하지만 이건 제 생각이고, 그거와 별개로 한국 사회의 어떤 지점들을 비판할 수는 있죠." <한국이 싫어서>를 쓴 작가의 언어 같지는 않다. 그는 <동아일보> 기자였다. 나는 조중동을 싫어한다. "그렇게 하나로 묶는 게 정당한가요? 그리고 진보 성향을 가지신 분들은 보수에 계신 사람들을 보고, 저 사람들은 다 한국 사회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거야, 라고 오해를 하는데 그렇지 않고요. 심지어 새누리당 안에서도 그렇고 동아일보 안에서도 그렇고, 한국에 문제가 있다, 바꾸자, 라고 말하는 정상적인 보수가 대부분이에요." 오해인가? 그렇다면 내가 그런 오해를 하는 사람이다. 보수, 싫다. 새누리당, 싫다. 잘못해도 안 잡혀가는 전직 대통령 싫다. 편협한 거 안다. 하지만 이런 편협함마저 없으면 답답하고 억울해서 대한민국에서 살 수가 없다. '한국이 싫어서' 나도 이민 가고 싶다.
장강명은 이어서 말했다. "보수에 있는 분들 중에 상당수는 진보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가라앉히려고 한다, 한국이라는 나라를 불태우려고 한다, 라고 생각하는데 제가 생각하기엔 그렇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분들 중 상당수는 총체적으로 체제 부정을 하는 분들이 아니고 고쳐 쓰자고 하는 분들입니다." 그는 중도적인 사람 같았다. 나는 그의 그런 차분함이 신기하고 놀랍고 한편으로 무서웠다.
"<표백>도 그렇고 <한국이 싫어서>도 그렇고 저는 애국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썼어요."
애국소설? "자살이나 이민이 해결책은 아닐 거예요. 중요한 건 이런 결론에 이르기 전에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해야 한다는 거죠. 결국 그런 질문을 던지고 싶었던 거예요." 나는 막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중도이거나 보수 성향이니까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진보 성향을 가진 소설가는 그런 소설을 쓸 수 없다. 아마 그럴 것이다. 콤플렉스의 발현처럼 보일 테니까. '왼쪽' 성향을 가진 소설가는 어떤 적나라함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저 자식 봐, 저런 소설이나 쓰잖아. 역시 빨갱이들은 어쩔 수 없어, 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왼쪽' 성향을 가진 소설가에게 자살이나 이민은 현실의 이야기이지,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이러한 현실을 소설로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못내 장강명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가 어떤 사명을 갖고 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그는 그저 쓰고 싶은 것을 쓸 것이다. 하지만 그가 던지는 질문은 그만이 할 수 있다. 나는 보수 언론이 싫다. 편협하고 어리석다는 거 안다. 나는 장강명은 싫어할 수가 없다. 어쩌면 이제 그에게 의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국이 싫은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하는 놈들이 이 땅에 너무 많은 것은 사실이다. 나는 누군가의 눈에 빨갱이일 것이다.
소설에 관해 장강명이 도달한 한 지점에 대해 더 이야기해야 한다. 몇몇 소설가들이 나에게 장강명의 소설이 문장이 투박하며, 이야기 구조가 단순하다고 말했다. 쉽게 말하면 이렇다. 장강명의 문장은 잘 읽힌다. 은유의 맥락이 감싸고 있는 문장이 아니다. 소설적 장치가 내용을 견고하게 보완하지도 않는다. 그는 빙빙 돌리지 않고 할 말을 한다. 그건 의심할 바 없이 이 시대의 흐름일 것이다. 누군가 나서서 속 시원하게 '까발려' 주기를 바라는 시대. 나는 그의 언어가 이러한 흐름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지켜봐야 한다. 장강명이 이 시대를 어떤 식으로 증명해나갈지. 소설의 언어는 단순히 활자 이상의 것이기 때문이다.
"<표백>의 여자 주인공이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런 지적을 염두에 두고 <한국이 싫어서>를 썼습니다. 귀담아들을 비판은 언제나 기억해둡니다. 하지만 좋은 소설에 대한 제 관점이 있습니다. 이것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장강명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어야 한다. 그가 소설로 증명해 나가는 것들을 우리 시대는 보아야 한다. 중도 아니 내가 보기엔 보수주의자인 장강명이 소설의 이야기로 만든 현실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우려되고 기대된다. 왜일까? 지금 이 순간, 나는 뭐라고 한마디 더 첨언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뭔지 모르겠다. 판단할 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 땅에서 진보 성향을 갖고 사는 자의 무기력일까? 슬프고 아프다. 그의 소설을 소설로 보지 못하는 내가. 미안합니다, 장강명 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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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설하고 장강명은 좋은 형이었다. 선하고 친절했다.
* 나는 그의 믿음이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믿음을 지키고 싶기 때문에...
* 그의 믿음은 단순하고 순결하다고 느껴졌다.
* 친구가 인터뷰를 읽고 메시지를 보냈다. '동아일보 기자들이 이 기사를 싫어합니다' - 사실이었다. 나, 욕 먹었다. 놀랍게도 사실이라니... 그 사람들 바보 같았다. 나만큼 바보 같았다.
* 거듭, 미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