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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Nov 13. 2016

귀신 강정

시인 강정

강정은 시인이고, 언어‘ 깡패’다. 그는 욕망을 분출하듯 언어를 쏟아내는데, 대부분의 시인들이 이때 꽤나 세상 눈치를 보는 데 반해, 그는 절대 그딴 걸 보지 않는다. 그의 시를 읽고 그를 추측하면, 강정은 인간 이전의 어떤 상태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인터뷰를 할 당시까지 그는 단 하나의 문학상도 받지 못했다. 그깟 상이 뭐 중요하겠냐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그가 트로피를 거머쥘 때까지.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귀신 강정


“첫 시집을 내고 10년이 다 되어가던 때였어. 문단에 내 또래가 거의 없었거든. 있어봤자 소설 쓰는 친구들이었어. 김연수랑 이응준 같이. 혼자서 외로워서 그랬나, 시 쓰는 게 별로 재미가 없었어. 이래저래 돈 버느라 바쁘기도 했고. 그런 차였는데 (김)행숙이부터 해서 (김)민정이, (김)경주 같은 후배들이 문단에 쫙 나오는데, 시를 잘 쓰더라고. 느낌이 옛날에는 그렇게 쓰면 사람들이 뭐라고 했는데, 어? 이렇게 쓰네, 얘들이? 외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지. 얘들이랑 놀고 싶네, 이런 생각을 했지. 그렇다면 나도 이제 더 써보자, 그렇게 해서 시를 계속 쓰게 된 거야. 그 시인들을 만나면 사이가 좋든 안 좋든 형제 같아. 더 오래 혼자 있었으면 아예 다른 일을 해버리거나 시 쓰는 걸 그만뒀을 거야.” 


강정이 다섯 번째 시집 『귀신』을 출간했다. 인터뷰를 핑계로 만났다. 나는 그를 경외한다. 그가 혼자서 10년을 버텼기 때문이다. 그는 스물두 살에 등단했다. 너무 어렸으며, 너무 낯선 시를 썼다. 저 일군의 젊은 시인들 이전에 강정이 있었다. 그들이 등장한 이후에도 강정은 있다. 그래서 강정은 편의상 짓는 어느 한 구분 속에 들어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많이 물어봤어. 당신은 너무 일찍, 그런 시를 써서 손해 본 거 아니냐고. 그런데 내가 별 욕심이 없어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안 들었어. 오, 이 새끼들 봐라? 이런 거지 뭐. 신기하기도 하고.”


새 시집 『귀신』을 읽으며 새삼, 아, 이 형의 언어는 거침없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미끄덩한 길의 끝에 음부를 꽂은 채 / 몸안으로 뻗치는 길의 가지들을 느낀다’ 「( 천둥의 자취」) 같은 문장은 그의 호방함을 증명한다.


“이거라도 내 마음대로 해야 할 거 아냐. 나는 시나 사는 거나 그냥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시를 쓰는 의미가 없는 것 같아. 시 쓰는 거는 그냥 내가 나를 풀어놓는 하나의 방법이니까.”


시집 제목인‘ 귀신’은 내가 그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연상되는 단어다. 그는 내가 습작생이었을 때 “반은 내가 쓰고 반은 귀신이 쓰는 거야”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말을 무의식을 열어두고 시를 써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귀신』을 받아들었을 때 속으로 ‘드디어’라고 말했다. 강정의 시가 드디어 여기에 닿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갖는 확신들이 있는데 그걸 놔버릴 때 시가 써지는 거지. 그럴 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몰라. 귀신이 나를 불러 가는 거지. 시집 원고를 정리할 무렵에 내 시를 내가 보는데 귀신이 지껄이는구나 싶었고, 그래서 처음엔 반 장난으로 편집자한테 제목을 ‘귀신’으로 하겠다고 말했는데 정말 이거 말고 다른 제목이 안 떠오르는 거야.”


『귀신』은 불완전한 시집이다. 어떤 시집이 완전하겠냐만 『귀신』은 완벽을 지향조차 하지 않는다. 시의 틀을 따르기보단, 자신의 논리와 무의식을 좇는다. 거침없다. 그래서 『귀신』은 시집을 잡아먹는다. 『귀신』을 손에 쥐면 시집의 겉면이 아니라 시의 내면이 만져지는 것 같다. 물컹하면서도 깊고 속을 알 수 없는.


“그런데 시집을 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 첫 시집 『처형극장』에서 했던 것들을 다르게 하고 있구나, 결국 옛날에 다 했었구나, 그때 뭐가 뭔지도 모른 상태에서 해버린 것들이 있었구나……”


시를 쓰는 게 기쁘지 않을 때 강정을 생각한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처형극장』이 생각난다. 그리고 자부심을 느낀다. 그건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도 극소수만이 누리는 기쁨이니까. 『처형극장』에서 『귀신』까지 강정의 시는 줄곧 딱딱한 바위에서 부드러운 물고기를 길어냈다. 죽음마저 아름다운 것으로 만드는 강정의 언어는 치명적이고 불온하게 느껴진다.


강정은 단 하나의 문학상도 받지 못한 시인이다. 그래도 언제나 당당하다. 시를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그저 지껄이듯 마음대로 쓴다고 했지만 그가 등단한 지 20년이 넘었다. 그와 그의 시는 시간을 견뎠다. 


“자신감이 있으니까 계속 쓰는 거겠지. 내가 주먹이 약하다 싶으면 다 무서워 보이잖아. 근데 반대로 주먹에 자신 있어서, 덤벼봐, 이러면 아무도 안 덤비잖아.”


누구라도 언제까지 강정을 외면할 수는 없다. 살아 있는 귀신 강정을.

2014. 10. 16



*문단 내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 고발자, 연대하는 모든 분들을 지지합니다. 

더 많은 마음이 그분들과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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