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황현진은 기꺼이 물속에 있다
언젠가 황현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소설에 대해서가 아니라, 소설가로서 황현진에 대해. 지난겨울 그녀는 내 앞에서 엉엉 울었다. 내가 그녀를 울렸다. "아무개랑 아무개는 소설 잘 써서 청탁도 많이 받고, 학교에 강의도 나가는데, 너는 뭐하니? 대낮까지 잠이나 자고." 미친놈. 정신 나갔었지. 하지만 내 눈엔 황현진이 그 아무개랑 아무개보다 뒤질 게 없어 보였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얘기한 건데.
황현진은 장편소설 <죽을 만큼 아프진 않아>로 2011년 문학동네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나는 그녀를 볼 때마다 거룩한 무엇이 잉태되어 있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발을 다쳐서 절뚝이면서 다닐 때 그녀는 내 발을 발로 찼다. 화를 내는 나에게 "정말 아픈 건지 확인해보고 싶었어"라고 말했다. 우리는 싸웠다. 그녀가 밤에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어쩌면 안 아플지도 몰라, 나는 이런 기대를 하는 거야. 아픔을 잊는 나 나름의 방식 같은 거지.' 그녀는 진심이었고 나는 슬펐다.
궁금한 것들을 메일로 적어 보냈다. 자신의 깊은 곳을 고백할 음성이 그녀에게 없기 때문이다. 그녀는 말을 두려워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어쩌면 그래서 소설을 쓰고 있는 것이라고. <한겨레> esc에 너에 대한, 사실은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데, 아무튼 글을 쓸 거라고 말했다. 그녀는 좋아했던 거 같다. 그녀는 한겨레를 좋아한다. 현직 대통령을 싫어하고, 반면 과거의 어떤 대통령을 좋아했으며, 소설 출간 계약금으로 엄마와 남동생 부부에게 해외여행을 선물한 적이 있고, 자신은 최근까지 건강 보험료를 못 내 매달 독촉장을 받았다. 나는 그녀가 그녀를 모른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기억나지 않는 어제의 일들을 기억해내기 위해 매일 애쓰기 때문이다. 기억해내려고 하는 사람에겐 기억나지 않는 것이 있다. 자신을 탐구하는 사람에겐 자신이 모르는 자신이 있다.
"난 미래를 꿈꾸는 사람이 아니야. 과거를 해석하면서 오늘을 사는 인간이야. 그걸 소설로 쓰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의 말이 충고나 격려로 들리기보단 질책과 꾸중으로 들려. 심하게 혼이 나면 누구나 울잖니? 그때 나는 생각했어. 이렇게 살 거면 왜 많은 것을 포기했을까. 내가 포기한 존재들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왔어." 그녀가 메일로 대답을 적어 보냈다. 그래서 울었구나. 포기하면서 살았는데, 아무것도 못 이룬 거 같아서. 그녀는 자책하며 산다. 그런 감정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나는 모른다. "누나는 왜 그렇게 되었어?"라고 물어야 할 텐데, 사실, 알고 싶지 않다. 상처를 캐묻는 게 왜 옳은가? 나는 위로해주는 친구가 되고 싶다. 물론 울렸지만….
최근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에 연재를 시작한 소설 <두 번 사는 사람들>은 그러한 우울의 기원을 찾는 그녀 자신의 노력같이 느껴진다. "<두 번 사는 사람들>은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질문을 던졌고, 그 질문에 대해 탐색을 하는 소설이야." 그녀는 언제나 시끄럽게 웃는다. 농담을 하고 별의별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녀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들이다. 그녀는 글을 쓰며 자신을 증명해 나간다.
"<두 번 사는 사람들>의 핵심적인 시간대는 1979년이야. 내가 태어난 해지. 나는 소설을 통해 내가 살아온 시간을 확인하고 증명해왔는데, 그러다 보니 내게 찾아온 궁금증은, '나는 왜 이런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지?'라는 거야. 그래서 내가 태어난 해를 기점으로, 전후의 세계를 지도로 그려볼 필요를 느꼈어. 영향권이란 어떤 의미에서 내 가족이지."
소설이 그저 한 편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훌륭한 소설가들은 소설로써 삶을 살았다. 소설은 예술이 아니다.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가가 이야기로 삶을 개척하고, 동시에 삶의 본질을 찾아나갈 때 소설이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외적이다. 그런 소설가에게 표절은 불가능하다. 남에게서 얻은 문장과 이야기는 자신의 삶과 맞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느닷없이 표절에 대해 언급하게 됐는데, 표절한 작가는 결코 그 사실을 시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삶을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은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이야기꾼이라고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번 사는 사람들>은 연재 중이지만 그녀는 올봄에 이미 모든 작업을 끝냈다. 한창 소설을 쓸 때 말했다. "대작이야. 대한민국 소설사에 한 획을 긋는 작품이 될 거야." 거짓말이다. 그녀는 자신에 대해 과장하고 희화화한다. 그것이 말을 믿지 않는, 그녀의 윤리다. 자신에 대해, 소설에 대해, 고민이 깊어질수록 그녀의 과장 역시 거대해진다. 그래서 <두 번 사는 사람들>을 나는 한 번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 그저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인간이 고뇌한 궤적이며, 본질에 다가가려는 의지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족을 단다.
오랫동안 나를 붙든 죽음의 장면이 있어. 분노와 아픔, 상실감, 의심과 의혹, 복수심, 원망, 후회 등을 비롯해 왜 그는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었는가, 왜 그를 구하는 사람이 없었나, 왜 사람들은 그의 죽음 앞에서 도망쳤나, 라는 질문을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었는데, 세월호는 그걸 가장 폭력적으로 내게 일깨웠어.
그녀는 큰 사건을 개인사로 축소시켜서 미안하다고도 적었다.
다시 한번 통감한 무엇이 있다면 동시대의 모든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고 난 후에도 서로 계속 소통한다는 거야. 우린 이미 연대하고 있는 거지. 내가 슬퍼하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게 그 증거야.
그녀가 적어 보낸 소통과 연대에 대해 이 글을 쓰며 줄곧 생각했다. 무력감은 그 사건이 살아 있는 자들에게 준 최대의 상처일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적어 보낸 답변을 읽으며 그저 공허한 분노만으로도 우리는 어떤 싸움에 힘을 보태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무리는 이 싸움이 끝나기를 바랄 것이다. 하지만 아직 황현진은 기꺼이 물속에 있다, 라고 나는 굳이 적고 싶다. 이런 문장이 얼마나 무책임한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아직 물속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이러한 믿음은 황현진에게 아주 중요하다. 어쩌면 그녀의 삶 전체를 담보하는 믿음일 수도 있다.
"나는 아직 열심히 안 사는 것 같아. 포기할 게 남아 있는 것 같아." 삶과 소설이 그녀에겐 같은 단어다. 그러지 말라고, 포기해야 소설을 쓸 수 있다면, 그깟 거 버리라고 말해주는 게 친구의 도리일까? 그러나 나는 못내, 우리 시대가 한 명의 정직한(이 이상의 수사를 찾기 어렵다) 소설가를 얻는 기쁨을 박탈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녀가 울면서 걸어갈 세계를 고대하고 있다. 그녀에게 잉태되어 있는 세계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다시 살아날 것이다. 나는 아프고 미안하다.
한겨레 esc
2015.06.25.
: 황현진은 내 애증... 그래서 귀한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