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미래인 <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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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출간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가 최근 작품집이죠. 어제 이 책을 다시 읽었어요. 단편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에서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트럭을 타고 떠나잖아요. 저는 약간,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라고 생각했어요. 이 남자가 사람 한 명을 박살 내고, 트럭을 훔쳐 탄 건데, 소설이 거기서 끝나면 어떡해요? 살 길을 마련해주던가, 아니면 확 죽이던가, 해결을 하고 끝내야죠.
결말을 왜 그렇게 처리했냐고 묻는 거예요?
네. 무책임한 거 아니에요?
작가가 뭘 책임져야 하는 존재는 아니잖아요. 어떻게 보면 절망적인 결말인데, 저에게는 절망을 비전으로 바꿀 낙천성이 없다고 할까요? 뭔가 훈훈하고 따뜻한 비전, 그런 걸 만들기에는 내가 좀 뭐랄까, 그런 게 없지. 있는 그대로 건조하게 또는 차갑게 보는 편이에요.
솔직히 말하면 저도 그런 결말을 좋아해요. 파멸의 상태에서 끝이 나는 게 다분히 현실적이니까.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세월호 사건 이후에요. 이제는 작가들이 파멸의 상황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현실이 소설보다 훨씬 끔찍하다, 무엇이라도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 라는 게 제 입장이에요.
최근 사회 문제에 관해 작가들에겐 책무감이 없느냐, 하는 질문을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책무감을 가져본 적이 없어요. 책무감이라는 건 내가 지식인으로서 또는 예술가로서 정체성이 있어야 가질 수 있는 건데, 나는 그런 정체성을 가져본 적이 없거든. 그러니 거창한 책무감 같은 것도 가질 수가 없죠. 저는 그저 개인일 뿐이고 철저하게 개인으로서 살아갈 뿐이에요. 오히려 그렇게 살아가는 게 세상에 해악을 끼치지 않는 윤리적 삶이라고 여겨요. 부자를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라는 게 제가 작가로서 가지고 있는 윤리 의식이에요. 제 작품들을 보면 사회 밑바닥 이야기가 주를 이루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 고민은 좀 다른 거예요. 아무리 사회 의식이 투철하다 한들 빤한 미학만을 되풀이 한다면 그것이 세상에 유효하겠어요? 작가라면 어떤 스타일 속에 그런 의식을 담아내느냐를 더 고민해야 한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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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고래>가 출간됐을 때, 평단도 독자도 대단하다고 했잖아요. 저는 <고래>가 대단한 게 아니라, 한국 현대 문학이 너무 지루하기 때문에, 그런 소설의 흐름 때문에 상대적으로 <고래>가 주목 받은 거라고 봤어요. 벌써 10년이 지났어요. 그동안 변화가 없었어요. 여전히 한국 소설은 지루하고, 그래서 <고래>는 지금까지도 굉장한 소설로 읽혀요.
문단을 씹어달라는 거예요? 흐흐.
씹을 만큼 한국 문단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아요. 작아요.
왜 만날 그런 소설들만 나오느냐, 그 이유는 시스템 탓이 크겠죠. 다들 눈치를 봐야하니까. 모든 문학 활동이 결국 심사를 통해 평가받잖아요. 어떻게 써야 문학상을 받는지 다들 알고 있어요. 거기에 맞춰서 쓰고 있으니 새로운 미학이 나올 수가 없죠. <고래>를 썼을 때, 나 스스로도, 이게 그렇게 이상해? 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영화를 하느라 90년 대 한국 소설을 거의 안 읽었어요. 80년대까지는 꽤 읽었는데. 그래서 분위기를 잘 몰랐죠. <고래>가 그렇게 독특한 소설로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상상 못했어요.
한국 소설이 재미없는 건 영화 때문일 수도 있어요. 영화가 흥미의 모든 것들을 포섭해버렸잖아요. 소설은 그런 면에서 영화와 싸울 수 없으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 ‘순수 문학’의 영역 속으로 들어가 버린 거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보지 않아요. 한국 소설은 소설이 본래 가지고 있는 엔터테인먼트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어요. 미국의 경우를 보면 소설을 많이 읽어요. 물론 인기 있는 소설은 대부분 장르 소설이지만. 영화와는 또 다른 재미가 있단 말이에요. 영화는 비주얼로, 소설은 스토리로 착실히 나아가고 있어요. 할리우드에 이야기를 공급하는 건 다 소설이에요. 우리가 어떤 영화를 봤을 때 스토리가 재미있다 싶으면 거의 원작 소설이 있다고요. 최근 할리우드의 변화는 그 스토리를 만화 즉 그래픽 노블에서도 가져온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만화를 실사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기술이 발전했거든요. 그렇다면 이야기꾼들은 또다시 어디로 가고 있느냐, 미드로 갔어요. 당대 최고의 이야기꾼들은 지금 다 미드 쪽에 있어요. 할리우드를 떠받치고 있는 것도, 미드를 발전시키고 있는 것도 스토리 즉, 소설이라고요. 그런데 한국 소설은 이도저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 되고 있죠. 세상에 나와서 유효해질 수 있는 기능을 상실한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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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요. ‘천명관이 저거 왜 저렇게 삐딱한지 알아? 저러다가 영화 찍으러 가려고 하는 거야. 그래서 여기에 적을 안 두고, 바깥으로 도는 거라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하고 싶으세요?
글쎄. 옛날에 이런 얘기를 들었어요. 문단 바깥사람이 내 얘기를 하는데, 그걸 듣고 있던 어떤 평론가가 이러더래요. 그 사람, 이쪽 사람 아냐, 라고. 그런데 사실 제가 영화를 다시하고 싶다고 생각한건 최근 2년 사이거든요. 그전엔 영화할 생각이 없었어요. 내가 영화를 찍으러 가려고, 바깥으로 돈다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리고 그게 나한테 도움이 되겠어요? 전략을 그렇게 세우면 이상하죠. 차라리 여기서 잘 처신해서 문학상 몇 개 더 받고 영화판으로 가는 게 낫지.
상 타는 거에 관심 있어요? 뭐, 주면 좋겠지만.
내 나이에 뭐 타면 뭐해요. 그렇잖아요.
노욕이란 게 있더라고요.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니지만.
그런 분들 많이 봤어요. 그런데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가 ‘추하게 늙지 말자’예요. 추하게 늙지 않으려면 콤플렉스가 없어야 돼요. 그런데 인간이 콤플렉스가 없을 수 있나?
지금 제 눈앞에 그런 분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려고 노력을 해요. 실제로도 콤플렉스가 많진 않아요. 콤플렉스가 있다하더라도 그것이 삶을 흔들 만큼 크지 않은 것 같아요.
소설 쓰기 전에 영화 시나리오 쓸 때도 콤플렉스가 없었어요?
저는 살면서 뭐를 못해 본적은 없는 거 같아요. 하면 다 잘하는 편이에요.
공부는 싫어했다면서요?
공부도 잘 했어요. 고등학교 가서 놀다 보니까 못한 거예요. 열심히 했는데 못한 건 별로 없는 거 같아요. 제가 한때 보험 외판을 했었거든요. 되게 잘 팔았어요. 20대 후반 때인데, 정직원보다 3배를 더 벌기도 했죠. 이탈리아 양복 입고 다니면서 오너들 만나고. 그때가 제 인생 중 전성기였어요. 오히려 지금 못나간다고 할 수 있지. 하지만 잘 나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내 뜻대로 안 되게 영화예요.
아….
아까 얘기했듯이 돈이 많이 드니까. 영화로는 내가 실패했어요. 그래서 아쉽죠. 문학은 나름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도 있고, 나 보고 후지게 쓴다는 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이만하면 된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내가 왜 이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아, 추하지 않게 늙으려면 콤플렉스가 없어야 돼요. 그리고 또 하나. 돈이 좀 있어야 돼요. 작가들이 문학상에 목메는 이유가 물론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한 것도 크지만, 상금 3천만 원, 5천만 원이 굉장한 돈이잖아요. 특히 가난한 작가들한테는 절박하죠. 저는 상금 대신 책을 좀 더 팔면 돼요. 그럴 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다는 게 다행이고 감사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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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도 쓰고, 소설도 쓰고. 저는 천명관의 산문도 보고 싶어요. 하지만 허구가 아닌 글은 안 쓰는 걸로 알고 있어요. 굳이 안 쓸 필요 있어요?
몇 번 썼었죠. 몇 번…. 저는 할 말이 없어요. 그래서 허구를 쓰는 거예요. 저한테 <고래>가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 거 같아요. 세상에 대해 할 이야기가 없는 인간이 원고지 2000매를 쓰라는 미션을 받았을 때 쓰는 소설이라고.
할 말 없는 사람이 소설은 어떻게 쓴대유?
작가에게 에세이를 요구하는 시대는 지났어요. 그건 90년대 이야기예요. 지금은 작가가 흥미로운 존재도 아니고, 세상이 작가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도 않아요. 과거엔 음식에 대해서든 여행에 대해서든 인생에 대해서든 뭔가 읽을 만한 글을 쓸 사람이 작가 말곤 없었어요. 그래서 작가가 에세이를 냈죠. 하지만 지금은 전문가들이 많아요. 인생은 김난도, 여행은 한비야, 정치는 김어준, 요리는 누굴까, 박찬일? 백종원? 작가가 굳이 여기 끼어들어서 이 경쟁한들 이길 수 있겠어요? 작가들보다 깊이 있게 통찰하고 심지어 글도 잘 쓰는 사람이 많다고요.
지금 한 말이 산문을 안 쓰는 이유는 되겠지만, 별로 맞는 말은 아닌 것 같아요. 각각의 글은 그 사람이기 때문에 납득되는 지점이 있잖아요. 천명관이어서 의미 있는 글도 있다는 거예요. 제가 굳이 말 안 해도 알잖아요.
저는 문학을 하기 전에도, 소설가들이 에세이 내면 좀 없어 보이더라고요. 문학을 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 작가도 있고 아닌 작가도 있죠.
몰라, 전 암튼 좀 그랬어요.
없어 보이면 어때요.
없어 보이는 건 싫어요.
ARENA HOMME PLUS 2015, 07
photography 이상엽
interview 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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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은 멋있었다.
키는 작지만 컸다.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천명관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권력 밖에서 권력이 되었을 때, 그 권력을 버렸다. 그는 아무것도 없어서 망설일 이유 역시 없었다.
그에게는 소설이 있고 독자가 있고, 작고 귀한 정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