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복의 공부
이성복은 1980년 10월 출간한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 자서(自序)에 적었다. ‘이맘때 나는 어두워 가는 들판에서, 문득 뒤를 돌아보는 망아지처럼…’ 이 글은 예언처럼 지금의 이성복을 묘사한 것 같다. 이성복을 만났다.
이성복은 작년에 자신의 시사(詩史)를 정리한 책 3권을 출간했다. 시집 <어둠 속의 시>,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 대담집 <끝나지 않는 대화>이다. 이러한 흐름의 마지막 책으로 <아미산의 추억>을 출간할 계획이라는 이야기를 그의 제자에게서 들었다. 이성복은 3년 전 대학에서 퇴임한 뒤, 대구 팔공산의 원룸에서 글을 쓰고 있다. 정확하게 적자면 공부하고 있다. 그에게 어떤 공부가 더 필요할까? 그의 제자와 함께 그를 찾아가겠다고 연락했다. 그는 <아미산의 추억> 원고를 메일로 보내주며, 읽고 오라고 했다. 네 시간동안 그는 나와 작가인 그의 제자에게 자신이 겪고 살아낸, 비로소 깨달은 시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는 마음의 지표로 삼아야 할 문장을 모두 외운다. 집으로 돌아갈 때 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기운이 빠져 있었다. 존경과 경의를 표하며 이 강의를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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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일로 보내주신 <아미산의 추억> 원고를 읽고 막 웃었어요. 말투가 재미있으셔서요.
강의실 밖에서 만날 때는 빗장이 풀어지고, 밑바닥까지 다 드러나고, 아래위도 없어져요. 사람들 놀려먹는 건 특히 좋아하고.
아침에 몇 시쯤 일어나세요? 7시쯤 일어나세요?
대중없어요. 요즘은 하는 일도 없고 하니 골프연습장에 8, 9시쯤 나가면 하루 종일 거기 있어요. 거기서 밥 먹고, 놀고. 올해 <아미산의 추억>이 출간되면 <무한화서(無限花序)>라는 책을 내려 해요. 또 2004년에 낸 <프루스트와 지드에서의 사랑이라는 환상>을 증보해 개정판을 냈으면 해요.
시는요?
시는 뭐 쓰게 되면 쓰고. 시 안 쓴다고 깜짝 놀랐나요?
이성복이 시를 안 쓰면 누가 시를 써요?
하하하. (하지만 산문집 <고백의 형식들>에 그는 적었다. ‘아, 다시 한 번 1976년에서 1980년 사이처럼 시에 ‘올 인’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외에는 달리 길이 보이지 않는데, 도무지 시가 달가워 보이지 않는다.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밖에 없는데…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선생님을 만나면 묻고 싶은 게 있었어요. 아름다움이 뭐예요? 어떤 시, 어떤 소설, 어떤 영화, 어떤 미술이 아름다운 거예요?
일본 중세에 ‘노[能]’의 미학자로 제아미(世阿彌)라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이 아름다움을 아홉 단계로 나눴어요. 그 가운데 3등이 뭐냐면, 하얀 은그릇에 흰 눈이 소복이 담긴 상태예요[銀玩裏盛雪]. 얼마나 예쁘겠어요? 그런데 3등밖에 안 돼요. 다음은 눈이 천개의 산을 덮었는데, 하나의 봉우리에만 안 덮여 있어요[雪覆千山 爲其?高峯不白]. 이것도 너무 아름답지요. 하지만 2등일 뿐이에요. 1등은 뭘까요?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新羅夜半日頭明]’라고 했어요. 한밤에 해가 빛나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언어도단의 세계예요. 당시 중국에서 신라는 아주 먼 나라로 생각되었어요.
저는 셋 다 일등이에요. 그런데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라는 말이 제일 멋진 거 같아요.
3등은 왜 예쁠까요? 동일성이지요. 흰 눈에 흰 그릇이니 동일성이잖아요. 2등은 차별성이에요. 모든 봉우리가 하얀데 봉우리 하나만 까맣게 드러나니 말이에요. 어떻든 3등과 2등, 동일성과 차별성은 현세에 있는 것들이에요. 그렇지만 ‘신라의 밤중에 해가 빛난다’는 것은 현실 경계를 넘어간 거예요. 다시 말해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사라진 아름다움이지요. 지금 제가 쓰는 글은 몇 등 정도 되겠어요? 5, 60등 정도 되려나? 글은 한 편 쓰나 천 편 쓰나 차이가 없어요. 한 편, 한 편에 천 편의 수준이 다 드러나는 거예요. 한 편이 수준미달이면 아무것도 안 쓴 거나 마찬가지예요.
너무 무서운 말이에요. 정신의 절정에 이른다는 것, 그게 시이고, 예술인 거죠?
인간정신으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분야가 3가지 있다고 해요. 그게 어떤 거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시와 수학과 음악이 그렇다 해요. 사실 이 세 가지는 서로 다른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세 가지 모두 패턴을 추구하는 것이거든요. 이 책을 한번 같이 읽어볼까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말들을 모아 편집한 거예요. 지금까지 해 온 공부의 귀결이라 할 수 있지요. <꽃에 이르는 길>이라는 제목은 제아미의 ‘지화도(至花道)’를 제 나름대로 번역한 거예요. 거기 19쪽, 제일 밑에 있는 문장을 보세요.
‘수학은 패턴의 과학이다. 수학은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한다.’
수학뿐만 아니라, 시도 음악도 패턴을 찾아내고, 그 패턴을 반복 변주하는 것이지요. 가령 색맹 검사할 때 자세히 보면 완두콩 쏟아 놓은 것 같은 데서, 숫자 하나가 탁 튀어나오잖아요. 시인이 하는 일도 일상생활 속에 숨겨진 패턴을 찾아내는 거라 할 수 있어요.
‘수학자의 패턴은 화가나 시인의 패턴처럼 아름다워야 한다.’
이건 하디라는 영국 수학자의 말인데, 여기서는 음악 대신 회화(繪?)가 나오네요. 시, 수학, 음악, 회화 모두 패턴을 추구하기 때문에 아름다울 수 있는 거예요. 가령 어떤 수학자가 문제를 풀 때, 패턴은 아름다운데 답이 틀리는 경우가 있다고 해요. 그래도 결국엔 아름다운 것이 맞는 답으로 밝혀진대요. 수학하는 분들은 칠판에다 공식 같은 것을 써 놓고 넋을 잃고 감탄한다고 해요. 그런 공식 중의 하나가 오일러의 공식이라 해요. 여기에는 자연 상수 e, 허수 i, 무리수 π, 그리고 여러 수의 기본인 0과 1이 들어 있어요. 이게 무슨 소리인지 뭘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 하지요.
‘관념들은 색채나 단어들처럼 조화로운 방식으로 맞아 떨어져야 한다. 제일의 기초는 아름다움이다. 추한 수학에는 영원한 안식처가 없다.’
여기서 색채는 회화, 단어는 시의 기본 재료가 되는 것이지요. 어떻든 모든 것의 궁극적인 판단은 아름다운가, 아름답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는 거예요. 제일의 기준은 진(眞)이나 선(善)이 아니라, 미(美)예요. 달리 말해 아름다운 것만이 진실하고 선할 수 있어요. 그러니 추한 수학, 추한, 음악, 추한 시에는 안식처가 있을 리 없지요.
‘패턴 인지는 시와 음악과 수학을 막론하고 모든 미적 쾌감의 토대가 된다.’
어떨 때 우리가 아름답다고 말하느냐 하면, 막연하고 혼란스러운 것들 속에서 불현듯 패턴이 드러날 때예요. 패턴을 다른 말로 주제(主題), 테마, 혹은 모티프라 하지요. 이 패턴이 바로 세계의 본질을 이루는 거예요. 이 패턴을 파악하게 되면 미래의 대안(代案)을 예언할 수 있어요. 예언이란 본래부터 사물이 가진 질서이지, 점을 쳐서 나오는 게 아니에요. 그런데 패턴을 추구하는 여러 분야 가운데, 가장 무질서하고 일관성 없는 게 시가 아닐까 생각해요.
왜요?
음악이나 수학, 회화에 이용되는 재료들, 소리나 숫자나 색채는 시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아요. 하지만 시에 쓰이는 언어는 더할 나위 없이 불순하고 부조리한 재료라 할 수 있어요. 예컨대 ‘오월’이라 하면 미국에선 ‘메이퀸’을 연상하겠지만, 우리나라에선 ‘광주 항쟁’을 생각하게 되지요. 수학과 음악과 회화 같은 것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재료를 사용하지만, 시의 재료인 언어는 국가와 민족, 역사와 환경의 제약을 받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의 탁월한 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 자체를 즉물적으로, 즉각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거예요. 가령 음악이나 수학은 ‘똥’ 이야기는 못 하잖아요. 피나 정액, 살인, 강간, 질투, 증오 같은 것을 어떻게 음악이나 회화로 이야기할 수 있겠어요. 언어는 실제적인 삶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도구예요. 달리 말하면 언어는 우리 삶의 최전선(最前線)이지요.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 몸에서 모세혈관이 못 미치는 부위가 썩어버리듯이, 우리 삶도 그렇게 되고 말 거예요. 그처럼 언어는 대단하고 소중한 거예요. 그럼 이미 답이 나온 거 아니겠어요? 시가 뭔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말이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요.
그렇죠… 음, 그런가요?
시 쓰는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올라가는 엄마와 같아요. 여기서 아이는 독자지요. 아이가 어떻게 엄마의 보폭을 쫓아가겠어요. 그런데 요즘은 독자가 따라오나 안 오나 뒤돌아보지도 않고, 저 혼자 막 가 버리는 것 같아요. 시 쓰는 사람과 독자는 벽을 사이에 두고 대화하는 것과 같아요. 글 쓰는 사람은 자기가 보고 있는 것을 독자는 못 본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해요.
다음 장의 이 글은 뭐예요? 글 쓴 사람이 김현이라고 적혀 있어요. 대학 은사인 문학평론가 김현 선생 맞죠?
그래요. 1977년, 제가 [문학과 지성]으로 등단할 때 선생님이 써주신 추천사예요. 저는 항상 이 시절에서 안 벗어나려고 애를 써요. 그래서 늘 가슴에 새기려고 해요.
제가 읽어볼게요. ‘우리는 이번 호에도 새로운 시인을 소개하는 즐거움을 갖고 있다. 이성복 씨의 시에는 상처받은 젊은이의 아픔이 아픔 그대로 선열하게 노출되어 있다. 그 아픔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는 그것이 오히려 씨의 시가 지니고 있는 큰 장점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아픔의 근원과 증세가 확실하다면, 이미 그것은 아픔이 아니다. 그것은 치유될 수 있는 아픔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제가 앓고 있는 아픔은 사회적이거나 개인적인 아픔이 아니거든요. 인생이란 것 자체의 아픔이에요. 이 아픔은 치유될 수가 없는 거예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라는 말도 있지만, 이 아픔은 죽어서야 끝이 나요.
‘그 아픔을 시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자꾸 반성함으로써 그 아픔이 가짜 아픔이 되는 것을 막고 있다.’
언제나 자신에게 질문해 봐야 해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말이나 일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것을. 진실이 뭐겠어요. 진실이 따로 있는 게 아니에요. 가짜가 아닌 게 진실이지요. 진실은 아름다운 거예요. 거짓은 절대 아름다울 수 없어요. 언제 거짓말이 아름다운 거 본 적 있어요?
‘우리는 시인이 더욱 처절하게 아픔으로써, 저마다 이유도 모르며 치유할 방도도 모르는 아픔을 암종처럼 감추고 있는 우리에게 하나의 희망이 되어 줄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이 생기는 것은 희망이 전혀 없는 사람을 통해서인 것이다.’
이 부분에서 제가 평생 해야 하는 일이 뭔지 알 수 있어요. 예술가와 예수라는 존재는 참 가까운 것 같아요, 예수는 남의 아픔과 남의 죄를 대신해 죽었잖아요? 그 때문에 그는 우리 모두에게 희망이 되는 거지요. 희망은 언제나 더 큰 절망에서 생겨나요. 예수가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의 아픔이 우리의 아픔보다 크고, 또 그 아픔을 스스로 자진해 살아냈기 때문이에요 (그는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아니었다.)
선생님, 뜬금없는 질문인데요, 왜 대구에만 계세요? 서울에 오세요. 와서 강의도 하시고요.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후배 작가들이 많아요.
저를 꼭 봐야겠다는 사람들은 여기로 와요. 그럼 제가 다 만나지요. 그런데 좀 보고 싶다, 뭐 그런 정도라면 저를 꼭 안 봐도 되지 않겠어요.
명성 있는 분들은 서울 문단에 와서 신춘문예 심사도 하고, 젊은 사람들한테 한 수 던지기도 하잖아요.
작년에 책 세 권을 냈고,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라는 아포리즘의 개정판도 냈어요. 거기서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거의 다 했어요. 그것으로 충분한테, 무슨 말을 더 하겠어요? 옛날에 어떤 사막의 은수자(隱修者)가 그랬대요. ‘내 침묵으로 알아듣지 못했다면, 내가 말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정말 많은 독자들이 선생님을 흠모하는 건 아시죠?
그런가요? 어떤 사람이 이렇게까지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하는 걸 알면 저도 참 기뻐요. 정말, 사랑받는 사람은 그의 어깨에 천사의 손가락이 놓인 것과 같다고 하지요. 그 사람들이 저의 무엇을 보고 사랑하겠어요? 상을 몇 개 받고, 인터뷰를 몇 개 했다고 그러겠어요? 아니에요, 그건 실제의 저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들 마음속의 저의 자리예요. 실제로 저는 사랑받을 가치도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하지만 그분들 마음속에서 제가 그 자리에 서 있는 한, 그 자리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글 쓰는 사람은 자꾸 자신을 돌아봐야 해요, 자기가 바르게 살고 있는지, 영 반대 길을 열심히 가고 있는 건 아닌지.
자리가 뭐예요? 어떤 자리에 서야 하는 건데요?
예전에 인터넷에서 몇몇 분들이 저에 대해 쓴 글을 봤어요. 그건 한 개인으로서 제가 아니라, 그분들 마음속에 있는 시의 자리, 시인의 자리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자리를 기억하려고 그분들 글귀를 외우기도 했어요. 그분들 마음을 잊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말이에요. 그 자리는 눈물겨운 자리예요. 누구나 한 번 이 세상에 오지만,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잖아요. 그 자리가 없다면 우리들 하나하나는 너무 비참해요. 그분들 말씀을 대할 때마다, 지금까지 제가 살아왔던 세월이 서럽기도 하고, 제가 정말 그렇게 살았는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해야 그 자리를 엿볼 수 있고, 지킬 수 있나요?
기본이 뭔지 모르는 상태에서 뭐든 열심히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말이 있어요. 근본이 세워지면 길은 자연히 나온다는 것이지요. 근본이 서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비슷한 처지의 남을 곁눈질하고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자기 자리, 자기 살림살이가 없는 거지요. 시는 써도 되고 안 써도 돼요. 내가 꼭 시를 써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기본이 안 된 상태에서 쓰는 글은 쓰나 마나 한 글이고, 나아가서는 써서는 안 될 글이에요. 글쓰기에서 기본이란 ‘대상’과 ‘독자’에 대한 배려예요. 병원에서 주사 놓을 때,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리잖아요. 바로 찌르면 얼마나 놀라고 아프겠어요. 배려란 그처럼 사소하지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게 시라고 생각해요. 요즘은 점점 더 그런 시를 찾아보기 어려워요. 대개 자기 말고는 아무도 못 알아듣는 글을 쓰고, 아무도 다른 사람 글을 안 읽어요. 시인이 독자보다 많아지는 게 시가 망하는 징조라 하지요.
그러면 어떻게 써야 할까요?
널빤지로 눈 치우는 거 봤지요? 널빤지를 깊게 박고 힘을 들여 밀고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옆으로 다 새고 하나도 안 모여요. 또 밭 갈 때 쟁기 날을 땅에 깊이 박고 나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고랑이 패이지를 않지요. 글쓰기도 마찬가지예요. ‘긴 것은 고무줄, 고무줄은 검다, 검은 건 석탄’, 이런 식으로 마구 붙여 나가면 깊이가 안 생겨요. 탑 쌓는 것으로 말하자면, 초장부터 다 무너진 거예요. 이런 얘기는 끝이 없지만,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대부분 아까 말씀드린 책에 나와 있어요. 이제 <아미산의 추억>이라는 책에 세 꼭지만 덧붙일까 해요.
그 세 가지가 뭐예요? 다 알려주세요.
우선 제 <꽃에 이르는 길> 9쪽에 보면 <달팽이 별> 얘기가 나와요. 한 번 같이 읽어볼까요.
‘가장 값진 것을 보기위해 잠깐 눈을 감는다. 가장 참된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는다. 가장 진실한 말을 하기 위해 침묵 속에서 기다리고 있다.’
눈이 안 보이는 남자와 척추장애를 가진 여자의 사랑 얘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라고 하던데, 저는 보지 못했어요. 저는 거기 나온다는 말이 참 좋아요. 제가 써온 자폐적인 글 말고, 이런 게 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문장을 보면 누구나 감동받게 돼 있어요.
그럼 두 번째 문장은 뭐예요?
개그맨 김국진씨 아시지요. 그분 인터뷰에서 발견한 건데, 수준이 거의 프로스트나 프루스트 같은 사람과 맞먹어요. 저는 이분 사생활은 잘 몰라요. 그렇지만 이 문장 하나로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됐어요. 읽어보실래요?
‘이 길과 저 길이 상관없는 거 같죠? 사실은 다 연결되어 있어요. 뭐든지 두드려보면 다 찾을 수 있어요. 처음엔 아닌 것 같아도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길을 찾는 거예요.’
이건 앞에서 말씀드린 ‘패턴’과도 연관이 있는 문제예요. 패턴이란 결국 서로 ‘다른 것’ 안에 들어 있는 ‘같은 것’ 아니겠어요. 이 세상에서는 모든 게 다 연결돼 있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 연결은 바깥에 드러나 있지 않고 깊이 숨겨져 있기 때문에, 애써 두드려 보고 찾아내야 해요. 물론 두드린다고 다 보이는 건 아니겠지요. 하지만 두드려 보지 않으면 절대 길을 찾을 수 없어요. 글쓰기도 그렇지 않을까 해요. 차근차근 말을 맞춰 나가지 않고 ‘아무따나’ 막 이어붙이니,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겠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읽을 문장은 이 책 전체에서 제가 가장 사랑하는 문장이에요. 한 번 더 읽어주실래요?
‘입이 벌어질 정도로 어마어마한 남벽 아래서 긴 호흡 한번 내쉬고, 우리는 없는 길을 가야한다.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밀고 나가야한다. 어떤 행운도 어떤 요행도 없고, 위로도 아래로도 나 있지 않은 길을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
혹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2011년에 박영석 대장을 포함한 등반 대원 3명이 안나푸르나에서 조난당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젊은 대원의 일기장이 발견됐는데, 거기 적힌 글이라 해요. 눈보라 치는 혹한의 텐트 안에서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었는지 도무지 상상이 안 돼요. 저는 이 글이 문학의 정수(精髓)라는 생각이 들어요. 문학을 한다는 것은 그처럼 세상에는 ‘없는 길’을 가는 거예요. 상식적인 것은 전부 ‘있는 길’이고, 굳이 가지 않아도 되는 길이에요. 이 길은 오로지 우리 몸속에 있기 때문에, 거미처럼 스스로 길을 만들면서 가야 해요. 저는 이 글을 볼 때마다 나스메 소세키나 김수영을 생각하게 돼요. 그분들은 자기 자신을 ‘소처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글쓰기를 했어요.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길에서 ‘살아서 돌아와야 한다’는 거예요. 병뚜껑으로 하는 ‘땅따먹기’ 놀이 아시지요. 멀리 가는 것보다 돌아오는 게 더 중요해요. 저는 이 일기를 볼 때마다 할 말을 잃어요.
갑자기 제가 왜 눈물이 나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정말 좋은 문장은 눈물을 나게 하는 게 아니라, 눈물이 깊은 속으로 내려가게 만드는 거예요. 저는 문장을 어떻게 써야 할지 막막할 때마다 카프카를 읽어요. 아무 페이지나 펼쳐 놓고 말이에요. 카프카 문장은 전부가 시예요. 시적인 문장은 산문으로서는 약점이라 하지만, 카프카 문장은 그렇지 않아요. 거기에는 아무런 비유나 장식이 없지만, 본질에 닿아 있어요. 저는 그의 문장들 몇 개를 지금도 외우고 있어요. 그러면 저도 언젠가 그렇게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시를 쓰려면 시 가지고 말장난하는 것보다, 좋은 시 읽는 것이 더 중요해요. 또 좋은 작가가 되기보다 좋은 독자가 되려는 게 글쓰기의 지름길이에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스승을 찾는 거지요.
선생님의 스승은 누구예요?
김수영, 카프카, 플로베르, 뭐 그런 이름들을 들 수 있겠지요. 어떤 작가를 스승으로 택한다는 건 배우자를 택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해요. 스승이 없으면 헤매게 돼요. 아까도 말했지만 시 쓰는 사람은 시가 씌어지는 자리를 자꾸 돌아봐야 해요. 삼사십 년 썼다고 어느 날 좋은 시가 나오는 게 아니잖아요. 중학생은 바로 돼도 예순 살 먹은 문학박사는 잘 안 되는 게 이 세계예요. 바른 길을 찾아가지 않으면 백 년 천 년이 가도 헛방이에요. 평생 서울 간다면서 부산 가 놓고, 남대문이 왜 안 보이느냐고 떼를 쓰면 뭐라 하겠어요. 글쓰기에서 ‘서울 가는 것’은 자기 고통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거예요. 글을 쓰려면 내가 먼저 아파야 해요. 그래야 남을 아프게 할 수 있지요. 나도 안 아프면서 어떻게 남을 아프게 할 수 있겠어요. 결국 자기를 위한 공부[爲己之學]를 해야 하는 거지요. 글쓰기를 통해 자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면 자연히 알게 돼요. 시가 뭔지, 시가 어디 있는지 말이에요. 시는 시인에게 있는 것도 아니고, 대상에게 있는 것도 아니에요. 각각의 시 속에서 이야기 하는 사람, 즉 ‘화자’에게 있어요. 그 자리에 제대로 서면 모든 게 시가 돼요. 좋은 시는 언제나 독자를 그 자리에 서게 만들어요.
하지만 그게 어디 쉬워요? 시도 글도, 아무튼 뭐든 하려고 하면 어깨에 힘부터 들어가잖아요.
나한테 관심도 없는 사람을 무작정 좋다고 따라다니면 천리만리 도망가 버려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면 자연히 나를 좋아하게 되지요. 도망가게 만들 짓을 계속하면서 사랑받으려 한다면 어디 될 일이에요.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존대 받으려 하면서 홀대 받을 짓만 골라 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면 자연히 그 사람도 나를 소중하게 생각해요. 시도 마찬가지예요. 시가 나에게 올 수 있도록 모든 걸 갖춰 줘야 하는데, 시를 잡아채고 낚아채려고만 하니 도망 안 가고 배기겠어요.
(그가 마음속에 품고 외운다는 <꽃에 이르는 길>의 첫 장에는 ‘당신이 시를 열망한다면, 시로 이끄는 모든 것을 행하라’는 말이 적혀 있다. 이것은 가톨릭의 이시도르 성인(聖人)이 한 말에서, ‘하느님’을 ‘시’로 바꾼 것이라 한다.)
<아미산의 추억>에서 시의 자리는 극지(極地)라고 쓰셨잖아요. 굳이 그렇게까지 극단으로 밀고 가면서 시를 써야 하나요?
그렇게 묻는다면 그렇게 쓰지 않아도 되겠지요. 시를 쓰기 위해 극지에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자체가 그렇다는 거예요. 어떻게도 이름 붙일 수 없는, 헐벗고 누추한 것들의 유배지가 극지예요. 말 할 수 없는 것은 휘파람으로도 불 수 없다고 하잖아요. 아무도 위안해 줄 수 없고 위로받을 수 없는 극지에서 시 말고 무엇이 우리를 견딜 수 있게 해 주겠어요. 삶이 극지라면 당연히 시도 그래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거짓이에요. ‘극지의 시’만이 희망이 될 수 있어요. 왜? 진실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시라는 게 이렇게도 쓰고, 저렇게도 쓰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선택할 수 있다면 시를 쓸 이유가 뭐겠어요. 제가 이야기하는 건 주제나 형식의 문제가 아니에요. 무엇 때문에 문학을 하는가의 문제예요. 그걸 알려면 위대한 작가들의 책을 읽고, 그것을 자기 삶에 비추어 봐야 해요.
제가 가장 서럽게 읽은 시는 선생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에 실린 ‘어떤 싸움의 기록’이에요. 이 시가 수십 년을 살아서 독자의 가슴에 머물 걸 예상하셨어요?
그 시집이 나온 지 35년이 되었어요. 이렇게 오래 살아남을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 당시에는 정말 짐작도 못 했어요. 시인으로 등단하고 시집을 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지요.
젊었을 때 다른 작가들 시도 좀 읽으셨어요?
전 우리시대 제일 뛰어난 시인은 황지우와 최승자와 박남철이라 생각해요. 황지우는 재능이 특별하고, 최승자는 시에 순교했어요. 박남철은 뛰어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저렇게 갈 줄은 정말 몰랐어요.
요즘 사람들은 시를 안 읽어요. 선생님 젊은 시절의 독자들이랑 지금 독자들은 달라요.
어떤 시들은 자동차 깜빡이도 안 넣고 막 들어가는 것 같아요. 그러면 뒤에 따라오는 사람은 ‘식겁’하지요. 남들한테 하는 배려는 자기 자신한테 하는 배려예요. 그렇지 않으면 나도 다치고 남도 다쳐요. ‘시’는 ‘쓰는 사람’과 ‘대상’과 ‘읽는 사람’을 귀한 자리에 두는 거라고 생각해요. 자기도 안 먹는 밥을 남한테 내 놓으면 그걸 어디 대접이라 하겠어요.
photography 최경순
ARENA 2015.03
: 이성복은 절정으로 아름다웠다. 자꾸 물으셨다. 어떻게 지내는가, 라고. 처음 만났는데, 나는 그때 힘들었던 일들을 한참 털어놓았다. 선생은 별 말 없으셨다... 하지만 나는 치유 받는 느낌이 들었다.
: 이성복은 지금 시를 쓰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그저 지금은 평생 시를 쓰며 깨달은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고 했지만... 그가 여전히 시를 쓰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가 시의 전부는 아니다.
: 그럼에도 그가 안타까워 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시의 전부가 아닌 시를, 그는 써야만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나는 그의 새 시를 기다린다. 그러나 그 시를 가장 간절히 기다리는, 정말 '기다리는' 사람은 이성복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