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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Jul 20. 2017

박상륭

아무도 박상륭을 모른다 

: 박상륭 선생님이 돌아가셨다. 오래전, 지큐에 있을 때 그를 인터뷰했었다. 지면이 나왔을 때 박상륭 선생님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우셨다. 이유는 내 마음속에만 둘 거다. 

그는 곧 캐나다로 돌아갔다. 다음 해 봄, 그러니까 2009년 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 시인되십니까?" 박상륭 선생님이었다. 그를 인터뷰할 때 나는 습작생이었다. 그는 캐나다에서 인터넷을 통해 내가 등단한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나에게 맥주를 사주며, 반드시 작가가 될 거라고 했다. 의심하지 않았다. 의심은 내가 했다. 그러나 그를 만난 후에는 그런 의심이 사라졌다. 



아무도 박상륭을 모른다


독일에 괴테가 있고 러시아에 톨스토이가 있다. 우리나라엔 박상륭이 있다. 그가 신작 『잡설품』 출간을 위해 고국을 찾았다. 하지만 그를 제대로 아는 이 누구인가?



록밴드가 질러대는 괴성이 오후의 빛을 꺼버릴 것처럼 불안한 카페 안에서 박상륭이 대답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질문은, 한국 소설 사상 가장 형이상학적인 탐구인 『죽음의 한 여구』를 완전히 갈무리한 심정이 어떠신가요,였다. 순간 귀가 멍해졌다.  눈앞에 앉아 있는 백발의 노인은 모국어로 소설을 쓸 뿐 아니라 삶 자체가 이미 그 자신의 소설이다. ‘온몸으로 동시에 온몸을 밀고 나가는 것’이라는, 글쓰기에 관한 시인 김수영의 명제를 그는 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사십 년 가까이 존재의 근원에 맞서 ‘글쓰기’ 형식으로 고투를 벌여온 작가, “기표는 많은 듯해도, 기의가, 전대인들의 것에서 별로 나아가지도, 다르지도 않았다면, 그 작가는, 글을 썼다고 풍문만을 전할 뿐, 한 편의 작품도 쓴 바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박상륭 깊이 읽기」, 김사인과의 인터뷰에서 발췌)라고 말하는 작가, 인물의 몸동작이나 심리를 묘사하는 소설적 장치를 못내 갑갑해하는 작가, 철학적 사유와 서정적 고행을 언어로 쌓아 올린 작가, 인류를 위한 글쓰기를 천직으로 여겼지만 ‘난해함’ 때문에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 작가. 

좋은 인터뷰를 하려면 사전에 인터뷰이를 꿰뚫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박상륭에게도 가능할까? 날짜가 잡히고, 그와 관련된 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과정에서 미약하게나마 갖고 있던 박상륭에 관한 인상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다. 그중 어떤 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박상륭의 정신적 지지자였던 문학평론가 김현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그때 그는 「뙤약볕」을 막 발표한 뒤여서, 여기저기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는데, 그로서는 그것이 퍽 대견스럽고 기쁜 모양이었다. 사실상 그는 그 소설이 실린 잡지사의 편집장에게, 대낮에 그 흉악한 얼굴에 술기를 띠고, 걸작을 못 알아보는 잡지쟁이가 무슨 잡지쟁이냐는 투의 전투를 청한 적이 있었다.” 

체크무늬 블레이저를 입은 그가 머그컵에 담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웃었다. 『죽음의 한 연구』를 모두 갈음한 지금, 이제 삶에서 남아 있는 것은 고독과, 일생을 바쳐 탐구한 ‘죽음’ 뿐이라고 말하며.


1963년 사상계에 「아겔도마」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박상륭은 줄곧 죽음을 통한 삶과 생명의 이해라는 주제에 집착했다. 1969년, 간호사인 아내와 함께 캐나다로 이주한 후에는—죽음을 연구하기 위해 공동묘지를 순례하는 밀종파 스님처럼—얼마간 병원 시체실 청소부를 하기도 했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박상륭의 갑년을 기념하여 출간한 『박상륭 깊이 읽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저는 원래, ‘문학적’이었기보다는 ‘종교적’ 편향이 있었던 듯하다고 뒤돌아보게 되는데, 회피할 수 없는 처지에 처했을 때마다, 노쇠했었을 뿐만 아니라 몹시 병약한 어머니를 통해, 죽음의 공포를 당해왔었다는 얘기를 주억거려 왔더랬습니다만, 그때부터 죽음은 저에게, 변강쇠의 등짝에 붙어버린 북통 모양의 시체 같은 것이었습니다.”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그는 일생을 죽음 곁에서 살았을까? “구원이지요, 인간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해요.” 


정신 나간 록밴드가 스피커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시를 쓸 때, 나도 매번 무엇에 대해 쓸 것인가 고민하지만 일생을 바칠 주제를 탐구해본 적은 없다. 굳이 그래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는데 하물며 인류의 구원이라니! 그건 오히려 신의 영역이거나 시대를 대표하는 몇몇 철학자들만의 화두가 아니었나?


1975년 『죽음의 한 연구』를 시작으로, 탈고하는 데 이십 년이 걸린 『칠조어론』을 거쳐 이번에 출간된 『잡설품』까지, 이로써 작가의 일생을 바친 대작이 비로소 완성된다. 종교와 동서고금의 철학, 신호를 넘나드는 그의 글은 거대한 산처럼 쉽게 정보를 허락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높고 험해서만 아니라, 길은 셀 수 없이 많으나 모든 길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고 어디쯤에서 어떤 길로 옮겨가야 하는지 좀체 갈피를 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고작 몇 줄을 겨우 읽은 사람들은 간혹, 글의 골격이 되는 종교와 신화 들이 오히려 그가 쓰고자 혹은 전하고자 하는 이념을 속박하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한다. 본디 종교와 신화 같은 것들은 민족 혹은 역사적 특수성과 무관할 수 없다. 그러나 박상륭에게 그것은 하나의 보고이지 가시밭이 아니다.

사실, 소설 형식과 언어라는 기존의 관념 자체를 전복한 문학사적 업적을 차치하고라도, 우주를 이루는 관념의 총체들을 체화해 자신의 사상 속에 녹여냈다는 건 대한민국 문학사를 고대 시대까지 통튼다 해도 없을 일이다. 그는 이것을 스스로 ‘잡설’이라고 폄하한다. 종전의 인터뷰, 혹은 자전 에세이에서도 “전대인들이 흘린 그 이삭 줍기 짓이지요.” 같은 표현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겸손의 언어들에선 역설적인 자신감과 대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허무함이 동시에 읽힌다. 평생을 투신해 쓴 글에 스스로 고작 이 모양입니다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려운 일일 터다. 서운한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굳이 스스로 높이거나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진정한 가치는 언젠가 빛을 발할 거라 믿어서일까? 그는 혹시 그 자신 소설가인가 사상가인가의 문제를 우려하는 건 아닐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소설가 입네 자처한 적이 없다. “소설도 아니고 경전도 아니고 그 중간쯤 되니까 잡설이라고 불러야 옳지 않을까 생각을 했습니다.” 그에게 소설은 하나의 좋은 수단이다. 소설의 양식은 어떤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에 용이하지만 그가 기존의 소설 양식을 전복시켜온 건 새로운 형식에 대한 시도로서가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하는 데 있어서 기존 방식으론 어림없다고 생각했기 때문 아닌가. 그러나 그가 소설가로서, 구원을 위한 삶을 살아온 것인지, 구원을 위해 소설가로 살아온 것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평생을 걸고 써야 할 주제를 찾았다면 그것에 대해 연구를 해야지요. 누구보다 많이 알고 거기서 몇 걸음 더 나아가야 전대의 작가들이 썼던 것을 답습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그것이 위대한 작가가 가져야 할 덕목이라고 했다. 그 자신이 그 위대한 작가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부정하는 눈빛도 아니었다.


『잡설품』 출판기념회에서 박상륭은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작년 10월 한겨레에 기고한 칼럼 「자라투스트라 박상륭을 기다리며」가 이번 책을 집필하는 정서적 동기가 됐다고 밝혔다. 그 칼럼은 박상륭의 글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혹은 관심조차 갖지 않는 독자들을 ‘귀먹은 중생’ ‘무지한 중생’으로 표현했다. 난해함 때문에 박상륭의 글이 대중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글이 외경의 대상인 건 비단 대중들에게서만이 아니다.

“김윤식 교수의 표현은 지나친 자기 우월 의식으로 보여요.”

“모든 것을 구상화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이 과학을 발전시켰지만, 반대로 인간의 지적 능력은 떨어졌습니다. 그렇지만, 기자 분께서 그 말에 반감을 가지셨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훌륭한 겁니다.” 이어서, 구상화로 대표되는 서양적 사고방식으론 인류를 구원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동양적 사고방식이 해결책이란 말도. 『잡설품』은 이러한 사유를 바탕으로 쓰였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잡설이 있어요. 하나는 니체가 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나머지 하나가 내 글이죠. 첫 번째 잡설은 몰락의 축에서 쓰인 것이고, 백 년 후에 한국이란 나라에서 두 번째 잡설이 상승의 축에서 쓰인 거지요. 개인적으로 서양 철학이 니체에서 끝나지 않았나 생각해요. 니체가 신의 종말을 선언한 후로 세계가 급작스럽게 몰락했어요. (나는) 서구의 사고에서 벗어나 추상적 이미지, 즉 마음속의 우주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마음을 통해서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그 말씀이 너무 추상적이라고 느끼는 건, 제가 모든 걸 구상화하는 서양식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가요?”

“동양의 사고에선 마음이 곧 우주예요.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지만 나는 마음속에 신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구원을 밖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몸과 마음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책에 나온 자벌레처럼요?”

“서양적인 사고방식에 한계가 있고 동양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는 말씀에 상당히 공감하지만, 세계의 패권은 서구가 쥐고 있어요. 동양으로 옮겨질 것 같지도 않고요.”

“문제는 니체가 말했듯, 서양식 사고방식이 몰락의 축으로 연결된다는 거예요. 그 논리에 의하면 신은 죽은 거예요. 하지만 동양은 모든 걸 추상화하는 과정에서 상승의 축이 형성되고, 신들이 태어나고 나무도 신이 되고 돌도 신이 되고 원숭이도 신이 되고. 밖에서만 무언가를 찾으려고 하니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상승의 축에선 인간 안에 최 궁극의 뭔가가 있다는 거지요. 불교에서는 인간이 오관을 구비하고 난 뒤에 육관, 칠관, 팔관, 구관, 십관까지 깨뜨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육관 이상이 되면 신이라고 하지요. 그러니까 동양적인 진화론의 입장에서 궁극의 궁극이 존재한다는 거죠.”

“나무도 신이 될 수 있다고요? 말씀하신 신이란 구체적으로 뭘 말하는 건가요?”

“그건 구상적인 것을 추상화하려고 하는 데서 드러난 거고, 내가 말하려고 하는 신은 고행을 통해서 자기 속에서 인간보다 높은 차원의 자기를 발전시키는 것, 곧 인간의 재림인데 이것이 없으면 세계는 희망이 없어요.”

“니체가 틀렸다는 거죠?”

“니체는 이원론을 버리지 못했고, 자아의 중요성도 인식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예전 책에서는 니체하고 싸움을 많이 했는데 이번에는 내가 몰아붙인 거지요. 더 설 자리가 없을 거예요 아마.”

“서양 최고 철학을 완전히 전복시켜버린 거라면 우리가 자부심을 가져도 좋겠네요?”

“하하. 거 가져도 좋은 거예요. 니체 주의자들은 니체가 최고라고, 우리 한국에 사상은 없다는 식으로 자기 비하하는 수가 있는데, 사실 정직하게 따지면 니체는 구상적인 데서 초인을 보려고 한 거예요. 그게 대단한 것이 아니에요.”

“말씀을 듣고 있으면 깨달음의 경지가 장대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글쓰기 또한 몸으로 깨달은 것을 옮기시는 걸로 유명하고요. 그렇다면 『죽음의 한 연구』를 쓰는 수십 년 동안 가장 힘든 작품은 어떤 거였나요?”

“『칠조어론』. 이십 년 동안 나도 촛불승처럼 고행을 했어요.”


그가 커피를 좀 들라고 말했을 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눈앞에 있는 우주는 너무 거대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눈이 멀 것 같았다. 고행과 맞서려는 작가가 이 땅에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박상륭의 글을 어렵다고 한다. 만나보면 그는 글보다 더 어렵다. 그렇지만 어렵다는 한마디로 그의 글을 갈음하는 건 우주가 얼마나 넓은지 몰라서다. 물론 누구도 우주의 끝을 본 적이 없다.

절필 선언이랄 것까진 없지만 그는 더 이상 글을 쓰게 될 일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목소리엔 허무의 기운이 서려 있었다. “이번엔 조금 쉽게 썼으니까 박상륭의 소설도 읽을 만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떤 소설이 모두를 이해시킬 필요는 없다. 사상을 만드는 건 사상가지만 그것을 전파하는 건 후대인들이니까. 또한 곱씹으면서 읽어야 할 소설도 분명 있는 거니까.

출판 행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그는 캐나다로 돌아갈 예정이다. 

“가서 조용히 죽음을 맞아야지요. 병이란 병은 다 갖고 있어요.”

“속상하게 왜 자꾸 죽는단 말씀을 하세요.”

“종로 5간가 3가에 가면 집도 없고 희망도 없는 노인들이 많습니다. 그걸 보면 나도 저기에 앉아 있다란 생각이 들어요. 들뢰즈라는 철학자가 칠십이 센가에 자살을 하지 않았습니까? 한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로서 그 나이까지 늙어서 자살을 감행했다는 것은, 이 철학자 분이 그분들의 죽음을 대신해서 죽은 것이 아닌가, 대체 죽음이라는 하는데, 아마 그런 이유이지 잘 사시던 분이 갑자기 2층인가 3층에서 떨어져 죽을 이유가 없어요. 왜냐면 저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합니다. 노인네들에겐 남아 있는 게 별 의미가 없어요. 살아 있다는 게 정말 고통스럽고.” 죽음에 대한 오랜 연구가 당신을 구원하진 못했냐고 묻자, 그는 이제 겨우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담담해졌다고만 대답했다.

“시인이 되고 싶다고 하셨죠? 큰 시인이 되기 위해선 내가 처한 세계에 대해 그리고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해요. 작가라는 이름을 다는 순간부터 그 이름을 평생 등에다 짊어지고 사는 거예요.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그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럼, 학벌도 지연도 혈연도 아무것도 없어도 문제없을까요?”

“문학과 지성사 초기에 다 서울대 출신 놈들이 장악을 하고 있었는데, 이름도 없는 대학을 나온 한 녀석이 그 패거리들을 다 박살 내러 들어간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쓰세요.”

그 녀석이 바로 박상륭이었다.


GQ, 2008,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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