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나미에 May 04. 2020

Prologue

도시를 기억하는 이유

  돌이켜보면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릴 적부터 지리를 참 좋아했다. 복잡한 숫자 놀음도 아니고 흰색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씨로다 하는 것도 아니었고 교활한 인간 군상을 다루지도 않았다. 그저 지도의 해석이나 공간이 주는 지리적 정보에 대한 이해를 바라는 과목이었다. 그런데 그 공간은 기후별로, 지형지물 별로, 역사적으로 다양한 특성이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다. 지리라는 것은 우리가 밟고 사는 공간에 대한 정보, 그 자체이다. 나는 내 주변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이 궁금했다. 시간에 따라, 계절에 따라 바뀌는 풍경도 그렇고 처한 환경에 의해 삶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 때문에 나와 다른 환경에 사는 사람들에 대해 알고 싶었다.


  지금까지 여러 도시를 탐험하듯 돌아다닌 이유는 그 시절이 1박 2일 예능이 가장 잘 나갈 때였고, ‘내일로’라는 청년을 대상으로 한 철도 여행 상품이 보급되기 시작하던 때였다.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방학 때 ‘내일로’를 해봐야 한다는, 일종의 필수 코스였다. 대학교 2학년 여름, 첫 내일로 여행지로 부산 토박이에게는 미지의 세계였던 전라도권을 선택해 하루가 아닌 일주일짜리 장기 여행을 할 수 있는 첫걸음을 내디뎠다. 그 후로도 떠날 기회가 많이 찾아와서 강원도 겨울방학 내일로를 시작으로 미국에 가 보기도 했고,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23년 동안 살면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던 제주도에서 무려 4개월 동안 살아보기도 했다. 제주 유학을 다녀온 후 복학하지 못해 남은 시간을 어학연수로 충족하면서 가고 싶은 나라 1순위였던 아일랜드 땅을 밟아 유럽 냄새를 몇 달간 맡았다. 졸업 후에는 짧은 방황 끝에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갑작스럽게 지금까지의 역마살 본능에 눈을 떠 ‘로케이션 매니저’라는, 전공과는 아주, 상당히 무관한 직업을 선택하여 현재 4년 조금 넘게 겨우 연명 중이다. 그래도 직업적으로라도 항상 새로운 곳에 가면 설레고 지도를 보는 것을 일적으로 하고 있다는 게 재밌다. 사실 딱 맞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왜 한 공간, 하나의 장소에 안주하지 않고 계속 어디론가 떠나려고 했는지, 따지고 본다면 이론으로만 배웠던 지리 시간의 현장 체험 학습이거나 여행이라는 의미상에 있는, 새로운 공간이 주는 기운이, 그곳에서 경험해보는 새로운 것들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에서 잠시 벗어나는 게 좋아서라고 하겠다. TV 예능, 교양 프로그램이든 신문 여행 섹션, 여행 잡지 등 간접적으로 접해보는 매체가 주는 장소에 대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직접 가서 눈으로 보고 그곳의 공기를 마셔야만 비로소 나에게만 주어진 하나의 사명을 다 하는 마음으로 살다 보니 지금에 이르렀다.


  매년 기회가 생길 때마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같이 도시 여행을 하다 보니 어느덧 내 나이가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다. 나의 찬란했던 20대를 빛내주었던 것은 가 보았던 여러 도시에 대한 아련한 기억뿐이라 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이 글들이 완성되고 나면, 비로소 20대를, 아니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에 나와 있는 도시들의 순서는 나의 주관적인 도시 애정도를 기본으로 하였고. 수많은 도시 중 깊은 인상을 남긴 곳들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이 도시들을 찾아가 보았을 것이다. 이 글들을 통해 각 도시 속에 담겨있는 각자의 기억들을 떠올려 보았으면 좋겠다. SNS 업로드용으로 소모되고 있는 이미지적 공간으로서의 도시가 아니라, 도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 그대로를 들여다보았으면 좋겠다. 


아파트는 빈 땅을 계속해서 차지하고 우리가 보는 풍경도 변한다. 지금은 또 달라졌을지 모를 그때 그 모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