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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Nov 20. 2018

100년 후의 바닷속

'해저 2만 리'의 번외의 번외


퀴즈! 한국에 번역된 최초의 SF 소설은 무엇일까? 쥘 베른의 <해저 2만 리>다. 제목은 달랐다. 바로 <해저여행기담>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전시 제목도 <해저여행기담>이다. 원작은 1907년 3월부터 1908년 5월까지 일본에서 공부하는 한국인 유학생에 의해 ‘태극학보’에 연재되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이 원작을 자의적으로 수정했다는 것이다.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고, 국민을 계몽하기 시키기 위해. 고작 텍스트가 그렇게 위대한 일을 할 수 있었다고? 당시 국민들이 지금 우리보다 지적으로 뛰어났나 보다.

전시 <해저여행기담>은 ‘자의적 수정’이라는 태도 혹은 의지에 영향을 받았다. 전시장엔 파리에서 발행된 <해저 2만 리> 원본, <해저여행기담>이 연재된 ‘태극학보’ 원본, 그 외 희귀 고서적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8팀의 동시대 예술가들이 <해저 2만 리>를 오늘날의 모습으로 변주해 보여준다. <해저 2만 리>은 1869년에 출간됐다. 100년이 훌쩍 넘었다. 8팀의 아티스트들은 그 시간의 간극을 메우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해저 2만 리>라는 소설을 모티프로 현실 속의 새로운 ‘바닷속’을 설정해 나간다. 특히 주인공 ‘네모 선장’을 현대 인물로 흐릿하게 등장시키는 방식이 흥미롭다. 스튜디오 yog는 영상과 VR 잠망경을 통해 심해에 숨어 사는 네모 선장을 자신들의 모습과 동일시시킨다. 전시 소개 자료에 ‘창작자로서의 자신들의 정체성을 대입’했다고 적혀 있는데, 굳이 그렇게 결부시킬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일상 속의 창작자들이니까. 나는 동시대를 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의 기록으로 봤다. 

노상호의 작품도 인상적이다. 대중이 왜 그를 주목하는지 그는 예사롭게 증명한다. 어떤 주제를 대하는 노상호의 태도는 언제나 무심하다. 이를 테면 이번 작품을 만들기 위해 그는 인터넷에서 ‘해저 2만 리’를 검색하고 관련 이미지를 모아 먹지에 덧대어 베껴 그렸다. 검색어에 문제가 없다면 도출된 이미지는 무엇이든 상관없다는 태도를 취한다. 그 작품이 어떤 형태로 태어났는지 직접 가서 볼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그 작품을, 물속에 빠진 시간을 건져 올리는 기분으로 감상하게 된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그러게, 그냥 그렇다,라고 적는 게 그의 작품을 보는 나의 태도가 될 것 같다. 여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자체는 정교하고 구체적이다. (그는 마치 지금의 ‘네모 선장’ 같다!)

다른 작가들의 작품 역시 <해저 2만 리>와 <해저여행기담>이라는 원작을 떠올리지 않고 봐도 흥미롭다. 복잡하고 모호한 지금이라는 시대를 인격을 가진 존재들이 어떤 방식으로 견디고 있는가에 대한 이야기로 읽히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전시가 관객들을 행복하게 하는 지점은 당연히 원작이라는 희미한 ‘껍질’ 일 것이다. 관찰하고, 연관성을 찾고, 그걸 벗겨내는 묘미는 환상적이다. 정확한 전시명은 <번외 편: #해저여행기담_상태 업데이트>다. 먼 훗날 누군가는 이 시대를 업데이트하겠지? 전시는 8월 12일까지 열린다. 


2018. 05. 30. 한겨레 esc, 이우성의 낙서 같아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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