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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May 05. 2021

히어로 언니, 김연경

arana homme+, 2021_04

자, 이제 배구 보러 갈 시간이다.




사람들은 배구에 관심 없다(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데, 모든 사람이 배구에 관심 없다는 건 아니고, 배구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야구와 축구에 비해 적다, 정도로 이해해주면 되겠음). 하지만 김연경에겐 관심 있다. 김연경을 좋아한다. 키도 훤칠하고 목소리도 시원시원하고 박장대소하는 모습도 뭐랄까, 보는 사람의 막힌 속을 뻥 뚫어준달까. 존재 자체가 그냥, 강 스파이크다.

김연경이 배구 코트에서, 정확하게 배구 코트 공중에서, 공을 내려꽂는 모습을 보지 못한 사람들도, 김연경을 생각하면, 강 스파이크가 떠오른다. 김연경이 어릴 때 적성 검사를 받았다면, 추천 직업란에 ‘배구 선수’라고 적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지금 생각났는데 ‘아, 식빵’ 하던 ‘언니’가 이 언니였네. 난 남자다. 식빵 언니보다 나이도 많다. 상관없다. 나보다 키 크고 나보다 멋있으면 ‘언니’다. 김연경한테는 그냥, 그렇게 부르고 싶다. 언니.

헛소리하려고 이 글을 쓰는 건 아니지만, 뭐, 헛소리라고 해도 딱히 부정할 순 없기도 한데, 아무튼 속 터지는 일이 세상에 아주 많다. LH 직원이 땅투기를 하지 않나, 친구를 괴롭혀 ‘학폭’을 일으키지 않나, 5명 이상 모이지 말라고 해도 말 안 듣고 모여 전염병을 확산시키지 않나… (헛소리 안 하게 생겼어?) 굳이 이딴 현실을 여기에 가져다 붙일 필요 없겠으나, 세상이 하 답답하고, 김연경은 긴 다리와 팔을 힘차게 뻗으며 나타났다. ‘히어로’ 같았다고 적으면 만화 같은가.

이름에 ‘김연’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대한민국 보물이 될 운명을 타고난 게 아닐까 싶은데, 대표적으로 김연아와 김연경이 있다. 신기하게도 한 글자 차이다. 김연경은 김연아와 다른 맥락에서 미적이다. 김연아가 정교한 아름다움의 상징이라면, 김연경은 거침없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정말 ‘상징’이 되었어, 라고 묻는다면, 반문하고 싶다. 그럼 아니야?

여기서 중요한 건 ‘거침없는’과 ‘아름다움’을 연이어 사용하기가 낯설다는 것이다. ‘거침없는’과 어울리는 건 ‘하이킥’ 같은 단어일텐데, ‘아름다움’이라니. 나는 이것이 저 위에 적은 ‘하 답답한 세상’에 김연경이 활짝 열어젖힌 미의 형태라고 생각한다. 배구 코트 위에서 김연경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면 이 부분에 확신을 갖게 된다. 김연경은 당연히, 의심할 바 없이, 압도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강한 공격수다. 그러니까 공격을 잘하는 건 물론인데, 박수도 잘 친다. 박수? 그렇다. 동료들이 멋진 플레이를 펼치면 박수를 치고, 잘했다고 외치고, 등을 두드려 준다. 좋은 리더십의 형태로 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생각할 때 그 단계를 넘어선다. 이기기 위해서만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연경이 누군가를 격려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선수로서, 한 명의 인격체로서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객관적인 증거, 없다. 뇌피셜이다. 나는 그저 감이 아주 좋은 사람으로서 그렇다고 우길 뿐이다. 그러니까 내가 말한 거침없는 아름다움이라는 건 이런 의견을 포함한다. 전제는 이렇다. 김연경은 강하다. 엄청 강하다.

이런 바람까지 여기 적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미 적고 있다), 벌칙으로 김연경 스파이크를 얼굴로 받기 같은 걸 하면 어떨까? 아까 말한, 우리를 속 터지게 만든 주범들이 벌칙 받는 대상이고.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뒷조사를 해봤다. 김연경이랑 광고 촬영한 사람들에게. 인상을 잘 쓴다고 한다. 무서울 정도는 아니지만 안 무서운 것도 아니라고 한다. 광고 담당자들이 요청하는 건 어지간하면 다 해준다고 한다. 뭘 하든 빨리 빨리 끝내고 시원 시원하다고 하고. 김연경답다. 인상을 안 쓰고 친절하게 요청을 다 들어주는 건 김연경이랑 안 어울린다. 인상은 좀 쓰고, 할 건 하고, 어영부영 시간 때우지 않는 게 김연경답다. 뒷조사 중에 들은 말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드는 건 “거만하지 않아, 그 정도 위치에 있으면서”였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김연경의 행동을 한가지 말하자면, 같은 배구팀 쌍둥이 자매의 ‘학폭’ 사건이 터지기 전, 쌍둥이 중 한 명이 김연경을 공공연하게 비난했다. 당연히 불화설이 돌았다. 김연경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 에둘러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나라면 멱살 잡고 싸웠을 텐데.

김연경에 대한 미담은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쉽게 찾을 수 있다. 미담 발표회라는 게 생길 걸 미리 알고 준비해둔 학생 같다. 그런 게 있을 거라는 걸 미리 알 수도 없고, 물론 그런 게 있지도 않다. 그러니 그냥 멋있고 좋은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훈훈한 이야기들은 김연경을 빛나게 할 뿐 김연경 그 자체는 아니다. 어느 순간 김연경은 한 명의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김연경은 배구 선수다. 김연경이 배구 선수인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인데, 배구 선수 김연경이 배구하는 걸 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왜냐면 사람들은 배구에 관심이 없거든.

김연경이 소속된 배구팀 흥국생명은 쌍둥이 자매가 팀에서 이탈한 후 성적이 곤두박질쳤다. 흥국생명은 우승 후보 0순위였지만,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 우승은 어려워 보인다. 김연경 혼자 이끌고 가기엔 팀에 악재가 많다. 김연경은 해외 리그에 진출한 첫 번째 한국 여자 배구 선수였다. 유럽 리그에서 최고 용병으로 활약했다. 한국으로 복귀한 이유는 도쿄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기 위해서라고 한다. 지긋지긋한 전염병 때문에 올림픽이 열릴지 미지수다. 나는 다만, 뛰어난 실력과 존경받는 인성을 지닌 한 선수가, 자신의 마지막 꿈을 향해 스파이크를 날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오래 현역 생활을 하며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모습도 보고 싶다. 김연경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기면 좋겠는데, 최근의 경기를 보면 안쓰럽다.

이런 글을 쓸 때 ‘팬심’을 드러내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상관없다. 김연경이 소심한 내 마음에 채찍을 날리며, “야, 정신 안 차려” 라고 호통친 적이 많고, 그때마다 멘탈을 부여잡으며 가까스로 일어섰기 때문이다. 내 앞에 나타나서 그랬다는 게 아니라, 김연경의 거침없는 행동과 말, 경기 중의 플레이를 보면서 그런 위로를 받았다는 것이다. 위로! 따뜻한 말, 온화한 미소, 부드러운 포옹이 위로로 여겨지던 시대도 분명 있고, 지금도 그런 시대이긴 할 테지만, 김연경이 주는 위로는 조금, 아니, 많이 다르다. 등짝을 후려치는 위로랄까.

그러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그 전에, 김연경이 최근 찍은 캠페인 영상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김연경이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멘탈, 준비됐어?” 나는 이 영상이 많은 부분을 건너 뛰었다고 생각한다. “자, 준비해” 라고 말한다고 ‘멘탈’이 준비하거나 되는 게 아니다. 어떤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야 한다. 멘탈은 그래야만 준비하고 준비된다. 갑자기 ‘교훈’이라는 단어를 적는 건 뜬금없지만, 김연경이라는 상징이 주는 교훈은 자명하다.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 김연경은 강하다. 엄청 강하다. 그래서 말할 수 있다. “야, 정신 안 차릴래!” 배구공을 내려 찍던 손바닥으로 누군가의 등짝을 후려치며. 어쩜 좋나, 우리의 언니는 이미 욕도 해버렸다! 나는 그 모습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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