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성 May 05. 2021

같이 여행을 가려고

ktx magazine, 2021_05

곡우穀雨


윤석정


그때 처음 수돗물을 틀어놓고 울었다

오래 저장된 눈물이 있다는 듯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오는

수도꼭지처럼 잠글 수 없는


잠든 아버지의 파리한 얼굴을 바라보았을 때

숨 막히는 병실을 빠져나와

복도에 서서 숨을 몰아쉬었을 때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며

어머니 없이 입원한 아버지

더 늦기 전에 수술을 해야 했다

저물녘 나는 병실 앞 복도에 기대어

아버지 없이 못자리를 해야 하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잠시 머뭇머뭇했더니

니 아부지 죽는다냐?

정말 아무렇지 않았다

그런 줄만 알았다


다 때가 있는 것인데

섣불리 목숨을 짐작했던 나는

가물던 마음을 들킨 듯

갑자기 울컥거렸고 몹시 요란했다







병원에 계시는 아빠가 다시 쓰러졌단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감정이 일그러져서 몸을 구기는 느낌을 받았다. 하, 그걸 허탈이라든가 괴로움 같은 단어로 일축할 수 없다. 간병인에게 전화를 걸어 아빠를 바꾸어 달라고 말했다. 아빠는 내 이름을 불렀다. “우성이냐?” 그리고 또렷한 의식으로 설명해주었다. 재활 치료받다가 종종 생기는 일이라고.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 후 의식이 그렇게 명확한 적이 없는 거 같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게 싫어서, 의식을 단단히 붙잡고 말한 걸까?

윤석정이라는 시인이 있다. 내가 데뷔했을 때 문단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었고 내 기준에서 좋은 시를 쓴다고 생각하는 시인이다. 종종 만나서 놀았는데, 나는 무엇보다 석정 형의 산적 같은 덩치가 좋았다. 보통 이럴 땐 듬직하다, 라고 표현해서, 나도 똑같이 그렇게 적는 게 싫지만, 석정이 형은 듬직하다, 라는 문장보다 어울리는 형질을 찾기 어렵다. 첫 시집 <오페라 미용실>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후 10년이 지나도록 두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몇 주 전에 형의 사인이 적힌 두 번째 시집이 도착했다. 제목은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안아도>이다. 아, 새삼, 안부를 묻는 일은 얼마나 소중한가(라고 적고 몇 명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낸 후, 다시 이 글을 쓰고 있음).

‘곡우’라는 시를 읽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밤에 혼자 훌쩍였다. 듬직한 석정이 형이 ‘수돗물을 틀어 놓고’ 울었다니까.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된다며 / 어머니 없이 입원한 아버지’라는 문장에서 느껴지는 현실감도 무겁고 아팠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로서는 연유를 속속히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냥 무엇인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나에게는 더 슬픈 문장이 아래 있다.

“니 아부지 죽는다냐”

하, 죽긴 왜 죽어. 기교 없이, 덤덤하게 뱉은 말인데, 가슴을 건드린다. 안다. 저 말 안에 얼마나 큰 슬픔 덩어리가 놓여 있는지. 불안한 예감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전, 확인해 보는 마음. 덤덤해야만 하는 것이다. 불안하게 흐느끼며 물으면 예감을 인정하는 게 되니까. 저 한 마디에는 한 생과, 나란히 앉은 여러 생의 운명이 걸려 있다. 상심하지 말자, 상심할 이유가 없어, 상심하지 않아도 되는 거지? 그래도 이 정도면 다행인 거지? 어렵고 낯설고 당황스런 감정이 몰려와 서로를 괴롭게 만드는 상황.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덤덤하게 묻고 대답을 기다리는 것이다.

내 상황 때문에 이 시가 더 애절하게 읽혔을 것 같다. 유사한 상황은 누구에게든 찾아온다. 거대한 이별의 순간을 먼 발치에 두고 그것이 다가오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삶이니까. 그래서일까. 아빠가 병원에 입원한 후 완전히 다른 모습의 아빠를 받아들이면서 우리가 함께 하는 여행이 끝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라고 말하는 게 싫고, 이제 나는 그 싫은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내 삶을 나누어 드리고 싶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방식이 있을 것 같다. 이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아직 어렵지만, 한편으로는 즐겁고 행복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마무리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소중함을 깨닫다. 그러니 갑자기 중학교 국어 시간처럼 이 시가 주는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새삼, 남아 있는 여행의 시간을 감사해보자는 것이다. 엄마와 아빠, 형, 누나, 언니 그리고 소중한 친구들. 누군가 곁에 없다면 곁에 있는 누군가. 함께 보내는 여행의 시간은 줄고 있고, 이것은 부득이하니,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남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아직 손잡을 수 있고, 목소리 들을 수 있다면, 충분하지 않은가. 석정이 형 시 제목처럼 <누가 우리의 안부를 묻지 않아도> 물론 살아가겠지만, 누구나 항상, 안부를 물어봐주길 원하지 않을까? ‘다 때가 있는 것인데’ 그 때를 놓치면, 황망히 서서 끝난 여행을 바라봐야 한다. 감정적인 이야기겠지만, 소중한 사람이 의자에 앉아 빈 자리를 바라보고 있다. 좋은 마음으로 여행을 가려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강백호의 네 번째 시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