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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Nov 17. 2018

이 시인되십니까?

 



이충걸은 정말 심심할 때마다 내 자리로 와서 말했다. “최승자, 박상륭, 이성복을 인터뷰해와.” 말이 쉽지, 그런 양반들을 어떻게 섭외하라고. 할 수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 셋을 모두 인터뷰했으니 행운아였다. 2008년 초여름이었던 것 같은데, 박상륭 선생이 한국에 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마지막 책이 된 <잡설품>을 출간하기 위해서였다. 건너 건너 담당 편집자를 알아냈고 전화를 걸어 섭외를 요청했다. <GQ>는 세계적인 잡지고 멋진 잡지지만 음… 선생 같이 연세 많은 분이 흔쾌히 인터뷰하겠다고 할 잡지는 아니다. 놀랍게도 선생은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어느 오후, 선생이 신사동 가로수길의 한 스튜디오로 왔다. 먼저 사진을 찍었다. 멋진 슈트를 두 벌 준비해 두었는데, 한 벌은 입고 한 벌은 입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으면서까지 사진을 찍는 게 어색했던 것 같다. 선생은 뜻밖의 상황에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선생이, 노인네를 욕보이려고 하시는 건지”라고 말하며 나를 봤다. 그가 화가 났건 말건, 나는 그의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정중했기 때문이다. 어린 나를 ‘선생’이라고 부르다니. 

촬영이 끝나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 젊은 사람들로 가득 찬 카페였다. 메탈 음악이 귀를 찢으려고 작정을 했다. 거기서 한 시간이 넘게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가 한 말의 대부분을 듣기는 했지만, 몇몇 단어는 정확하게 듣지 못했다. 녹음기를 켜 둔 상태였다. 인터뷰가 끝나고 나서야 녹음기가 켜져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의 말들이 내 머릿속에 너무나 명확하게 남아 있었다. 마치 말들이 쌓이듯이, 정말 그렇게 남아 있었다. 

소설 <죽음의 한 연구>로 상징되는 박상륭의 모험 혹은 도전은 <잡설품>에서 끝이 난다. 이 소설은 그가 일생을 바친 주제 ‘죽음’과 ‘구원’의 마침표다. 나는 그 소회를 물었고 그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들뢰즈의 죽음에 대해 잠깐 이야기했다. “더 이상 탐구할 게 없어졌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게 아닌가, 이 노인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나는 그의 말을 오래 곱씹었다. 십 년 이 지난 지금도 종종 그 말을 떠올린다. 일생을 바쳐 무엇인가를 이뤄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니까.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니체의 한계이자 유럽 문명의 한계입니다. 신은 마음 안에 있습니다. 동양적인 사고이죠. 세계의 중심이 동양으로 옮겨질 겁니다. 훨씬 더 광활한 대지가 동양에 있어요.” 그가 말했고 내가 물었다. ”그러면 박상륭은 니체를 넘어섰네요.” 그가 진지하게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진작 그 순간을 지나왔다고 했다. “작가가 되실 거라고요? ‘작가’라는 이름은 주홍글씨 같은 겁니다. 어깨에 평생을 짊어지고 살아야 해요. 굉장히 괴로운 겁니다. 시대에 대해 공부해야 하고, 왜 글을 쓰는지 공부해야 합니다.” 내가 그 말을 신사동 가로수길 근처의 정신없는 카페에서 들었다는 게 지금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이주일 정도가 지나고 잡지가 출간됐다.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서 그가 귀국할 때마다 머무는 광화문의 오피스텔로 갔다. 그는 나에게 맥주를 따라주었다. 한 잔을 마시자 다시 또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마시자 또 한 잔, 또 한잔 계속 따라주었다. 내가 잘 못 마시자 “괜찮습니다, 천천히 드십시오”라고 말하며 또 따라주었다. 그는 오랜 시간 캐나다에 살았고 한국 작가들과는 교류가 거의 없었다. 그때 나는 작가가 아니었지만 그는 나를 작가처럼 대해주었다. 후배 작가에게 선배로서 술을 따라주고 싶었던 것 같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술을 아주 많이 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술을 못 마시는데!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 선생 되십니까?” 그였다. 겁이 났다. 내가 쓴 인터뷰가 마음에 안 든 걸까, 혹시 불쾌했을까. 그는 말이 없었다. 그는 울었다. 소리 없이 울었다. “고맙습니다. 저에 대해 이렇게까지 이해해준 분이 없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도 길에 서서 울었다. 원래 눈물이 많지만 그 순간 더 많이 울었다. 박상륭은 늘 자신이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잡설품>의 제목이 ‘잡설품’인 이유도 “박 모 작가의 글도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니까. 이해받지 못하는 글을 그는 고행하듯 썼다. 문장으로 문장을 뚫고 나아가며 글을 썼다. 주홍글씨를 짊어지고, 몸으로 몸을 밀어내며 글을 썼다. 초고를 쓰고 나면 손으로 종이에 옮겨 적는다. 무려 10번을. 10번을 옮겨 적는 동안 많은 것들이 바뀐다. 물론 시간이 흐른다. 그래서 그의 문장엔 세월의 흔적이 담긴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다 파악해낼 수 없다. 박상륭은 너무 큰 작가여서 인류가 감당할 수 없다. 나는 감히 박상륭이 낯선 한 세계를 이룩하고, 그것의 존재만을 남겨둔 채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1년이 지났다. 그를 촬영했던 신사동의 한 스튜디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이 시인되십니까?” 목소리만 들어도 알았다. 아, 박상륭이었다. 그해 초 내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걸 신문에서 본 것이다. 그는 잠시 한국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그를 만나러 갔다. 그의 오피스텔로. 그는 또 맥주를 따라주었다. 한 잔, 또 한 잔. 술에 약간 취하니 긴장이 풀어져서 집 안 풍경이 자세히 보였다. 우리가 앉아 있던 거실에 작고한 김현 선생이 쓴 글자가 걸려 있었다. 선생과 액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액자 저 주세요.” 내가 말했다. “이 시인은 욕심이 많으십니다.” 그는 웃었다. 

그 아래 원고 뭉치 같은 게 보였다. 선생에게 물었다. “뭘 쓰고 계신 거예요?”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일어나서 그 원고를 들고 어딘가 깊은 곳으로 옮겼다. 남아 있을 텐데, 그 원고. 분명히 무엇인가 쓰고 있었는데. 내가 봤는데. 

선생의 부인께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 “한 항공사에 비행기표를 예매하러 갔는데, 거기 일하는 분이 선생님을 알아보신 거예요. 연세도 있고 하시니까 따로 예매 절차를 도와주려고 하셨나 봐요. 그런데 선생님은 끝까지 아니라고 하셨어요. 나는 그 박상륭이 아니다, 다른 사람이다라고.” 박상륭은 은둔하며 외톨이처럼 지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그저 자신의 문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 괜찮았던 걸까? 

한국을 떠나 이국에서 글을 쓰며 사는 나날이 그에겐 이미 죽은 삶 아니었을까? 나는 그가 살아서 죽음을 선택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그에게 비극이 아니니까. 보이지 않는 곳에 있고 만날 수 없는 곳에 있다면 그는 죽은 것인가 산 것인가? 살아도 죽은 것인가, 죽어도 살은 것인가? 수십 년 동안 그의 책은 한국에 있었지만 그는 한국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그가 죽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문을 열고 다른 방으로 갔을 뿐. 그러니 선생님, 우리 어디서든 언제든 다시 만납시다. 

아, 마감 때 내가 쓴 박상륭 선생의 인터뷰 기사를 읽고 이충걸 편집장은 웃었다. 내가 자리로 돌아와 앉아 있는데 그곳까지 따라와서 더 웃었다. 그리고 마감 중인 다른 기자들에게 <GQ>가 박상륭을 인터뷰했다고 자랑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사람이랑 일했다. 박상륭 선생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을 때 그도 웃었다.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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