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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뵈뵈 Oct 19. 2024

엄마와 딸과 화장실

- 거기에 그곳이 있어~

서울에서 내가 생활하고 있는 거처는 5층 다세대 건물이다. 이 집 가까이에 작은 공원이 하나 있다. 그곳에서 종종 아기에게 그네 태워 주는 가족, 배드민턴 치는 외국인들, 벤치에 앉아 쉬거나 대화 나누고 있는 여러 연령층의 남녀노소를 보곤 한다.  

    

공원이 넓진 않지만 갖출 것은 거의 다 갖췄다. 언제 심었는지 모르지만 햇볕을 가려주기에 충분히 자라 잎이 무성한 나무, 어르신들이나 필요한 사람, 누구든지 사용할 수 있는 운동 기구, 그네, 미끄럼틀, 정자처럼 생긴 공간 안에 놓인 벤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아니 가장 ‘요긴한’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 공중 화장실이 있다.     


우리의 거처도 넓진 않지만, 방 3개, 화장실 1개, 주방 겸 거실을 갖췄다. 성인 네 사람, 많을 땐 다섯 사람도 거뜬히 생활할 수 있는 공간이다. 한 방에 이층 침대가 놓여 있어 두 아들들이 위아래 그 침대를 사용하고, 아빠 엄마 한 방, 딸내미 한 방, 이렇게 방을 사용하면 별 불편함이 없다.

     

그런데 약간의 불편함이라 하면 화장실이 한 개인 점. 화장실 일을 보고 싶은 사람이 겹치는 상황이 되면 대략 난감하다. 그러나 이 집을 위한 아니면 이 집을 사용하는 우리 가족을 위한 ‘선물’인가? 바로 이 집 근처에 있는, 어림잡아 건물 1층에서 서른 걸음? 마흔 걸음쯤이나 되는 거리에 있는 그 공중 화장실!   

   

아침시간이든 저녁 시간이든 새벽이든 식구 중 누군가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있는데, 내가 급하다 싶으면 당장 달려갈 수 있는 곳. 구에서 관리해서 청소도 항상 깨끗하게 되어 있고, 비누나 휴지도 늘 구비되어 있는 곳. 얼마나 감사한지... 하하.     


오늘 새벽에 이 화장실을 이용하며 타임머신을 타고 잠깐 시간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려고 서설이 길었다.    

 

나의 취침 시간은 보통 12시 전인데, 잠이 들었다가 새벽이 되면 꼭 소변이 마려워 깨어 화장실을 사용하곤 한다. 오늘 새벽에도 2시 반쯤 잠이 깨었나? 화장실을 사용하려고 봤더니 큰 애가 샤워하는 소리가 들린다. 요즘 큰 아이가 한국사능력검정 시험을 준비한다고 집에 늦게 들어오는데, 12시도 한참 넘어 들어와서는  좀 쉬다가 이제 씻나 보다.      

 ‘어떡해? 공원 화장실로 가야겠다.’      

마침 막내가 잠을 자지 않고 태블릿에 그림 그리고 있다. (올빼미형 생활패턴을 살고 있어, 아직 막내한텐 대낮과 마찬가지인 시간...)      

 “Grace, 나랑 화장실 좀 같이 가주렴. 추우니까 겉옷 걸치고...”     

막내한테 화장실 좀 따라가 주라고 부탁하였다. 순순히 받아주는 우리 착한 딸내미.   

  

전에도 새벽에 한 번 이 공중 화장실을 사용한 적이 있는데, 그때는 혼자 갔었다. 서울의 골목길의 가로등은 유난히도 환해 칠흑 같은 밤이라는 표현하고는 너무 안 어울린다. 되려 왜 이렇게 환해? 생각하며 놀라기까지 한다.

밤중에 혼자 집 밖을 나섰다는 무서움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혼자 공공 화장실을 사용하며 느껴지는 정적이 왠지 살짝 무서웠다. 이 새벽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옆 칸에 들어와 화장실을 사용하는 소리가 들린다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도 들면서, 아무도 없어서 나의 바스락 거리는 소리 밖에 안 들리는 이 공간의 고요가 무서워 빨리 일을 마치고 잰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새벽엔 딸내미와 함께 나서는데, 얼마나 마음이 놓이던지... 누군가와 내가 무서움을 탈 수 있는 공간에 함께 가준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하고 안심하게 해 주는지 실감했다. 서둘러 나올 필요도 없고... 느긋하게 일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딸내미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 나도 모르게 타임머신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어릴 적 나의 시골집은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 있는 시골집의 구조라서, 주거 공간과 화장실이 분리되어 있었다. 마당 양쪽에 한쪽에는 농기구, 수확한 곡식 가마니 쟁여 놓은 창고가 있고, 맞은편에는 화장실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 입구 쪽엔 소변 모아 지게에 올려진 옹기, 분뇨와 고루 섞여 거름이 되고 있는 두엄더미가 있고, 저 안쪽에는 푸세식 화장실이 있다.  

    

가족이 배출한 분뇨가 겹겹이 쌓이는 곳.

어릴 적 나는 밤에 거기서 일을 보려면, 꼭 엄마와 같이 갔다. 일을 보려고 쪼그려 앉으면 ‘빨간 종이로 닦아줄까? 파란 종이로 닦아줄까?’라고 묻는 소리가 컴컴한 아래쪽에서부터 들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엄마랑 같이 있으면 그 소리는 생각도 안 나고, 일을 보면서 엄마랑 수다도 떨었던 기억이 아련하다.   

  

엄마와 딸과 화장실...


어릴 적에, 막내인 내가 엄마를 동행시켜 화장실을 다녀오곤 했었는데,

오늘 새벽, 엄마인 내가 막내를 동행시켜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럼 나는 엄마인가, 딸인가? 하하.  

   

집 근처에, 정말 필요할 때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공원 내 공중 화장실,

아무 싫은 내색 없이 기꺼이 따라와 주는 막내.

더불어 잠깐 나의 엄마를 만나고 온 시간 여행.  

   

오늘도 나에게 주신 ‘선물 꾸러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꺼내 볼 수 있게 해 주셔서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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