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사이로 봄바람은 긴 하품을 하고..
오늘 새벽 4시까지 잠 못 들고 이리저리 뒤척인 건, 어젯밤 느닷없이 마신 진한 커피 한 잔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잠을 설칠 걸 모르진 않았지만, 늦은 나이에 다시 시작한 학습으로 인해 동영상을 늦게까지 보고 내용을 정리하느라 일부러라도 마셔야 했습니다. 가끔은 세포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카페인들이 설탕에 절여진 레몬처럼 말랑해지며 숨이 죽는 날도 있어서 어젯밤도 혹시나 하고 은근히 기대했지만...
결과는 역시나였습니다.
“후우-.”
길게 숨을 내뱉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오전 10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밤새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한 탓에 눈이 뻑뻑하고 시립니다.
나는 바삭해진 몸을 간신히 일으켜 주방으로 갑니다. 커피포트에 물이 팔팔 끓는 사이, 세면대 앞에 놓인 거울을 잠깐 보니 까칠해진 얼굴이 영 마음에 안 듭니다. 나는 치약이 듬뿍 덮인 칫솔을 입에 쑤셔 넣고 밤사이에 쌓인 불평과 원망으로 텁텁해진 언어들을 바락바락 닦아 냅니다. 그리고 몽롱해진 얼굴에 찬물을 끼얹어 집 나간 정신을 붙들어 옵니다.
입술 주변을 시작으로 살살 누르며 꼼꼼히 얼굴을 닦아낸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은 후, 나는 다시 주방으로 와서 가슴에 별을 단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따라 한 김 식힌 후 마십니다. 따끈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몸 구석구석에 덕지덕지 붙어있던 무채색의 그을음이 조금씩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듭니다.
그때 어디선가 순식간에 다리를 스치며 바람이 휙 지나갑니다. 두리번거리며 바람의 정체를 살펴보니 아숏고양이 '레이'입니다.
“늦었어. 빨리 줘.”
잘 잤어? 하는 나의 아침 문안에 레이는 눈을 끔뻑 감았다 뜨며 눈인사를 건넵니다. 꼬리를 세우고 팔다리를 길게 쭈욱 늘여서 기지개를 켜는 녀석의 얼굴은 세상에서 가장 태평하지만, 신비한 우주를 품은 올리브색 눈은 내가 움직이는 대로 따라오며 원하는 것을 재촉합니다.
지금은 녀석이 간식을 먹을 시간입니다. 팬트리 문을 열고 츄르를 꺼내기가 무섭게 늘 그렇듯, 소파를 향해 꼬리를 바짝 치켜세운 레이가 당당한 걸음걸이로 나를 이끕니다. 나는 자기 몫을 이렇게 잘 챙기는 녀석이 참 대견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보다 낫구나, 넌.
"마마, 대령했사옵니다."
목표를 이룬 레이는 기분이 좋은 지 소파 앞 바닥에 털썩 드러눕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등을 바닥에 붙이고 배를 보이며 뒹굴뒹굴 구릅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 참지 못하고 내가 손을 내밀어 배를 살짝 만지니, 레이는 마치 장난감을 잡듯이 앞발로 내 손을 톡톡 건드립니다. 손가락을 살짝 움직이면 두 발로 꼭 붙잡고 씨름을 하다가 조금 과격해질 것 같으면 슬쩍 멈추고, 내가 앙증맞은 솜방망이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하면 보드라운 발바닥으로 인정사정없이 있는 힘껏 밀어냅니다. 그런 녀석이 너무 서운해서 나의 장난은 점점 심해지고 녀석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듯 무시무시한 송곳니로 내 손등을 살짝 깨뭅니다.
'아얏!'하고 내가 심하게 엄살을 부리니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체념한 듯 다시 바닥에 벌러덩 누워 뒹굴거립니다. 우리는 그렇게 한동안 밀당을 반복하며 장난을 이어갑니다. 따끔하며 나의 새끼손가락에 살짝 손톱자국이 난 걸 보니 조만간 이 녀석과 무자비한 전투를 벌여야겠습니다.
오늘은 날씨가 참 좋습니다. 겨우내 닫혀있던 창문을 활짝 열어보니 햇살이 제법 눈부십니다. 레이는 그 빛을 발견하자마자 천천히 햇살 쪽으로 걸어가더니, 따뜻한 자리를 골라 몸을 말아 눕습니다. 꼬리까지 단단히 허리에 감춘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마음이 몽글몽글해집니다. 그래, 오늘은 너처럼 살아야겠구나.
"너만 고양이니? 오늘은 나도 고양이라고."
때로는 시크하게 냉장고 위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고, 그러다 지루해지면 장롱 꼭대기에 앉아 아무 생각 없이 그루밍하며 시간을 보내는 수줍은 고양이처럼 오늘은 나도 마음껏 뒹굴거려 보겠습니다. 그러다 햇살이 창문을 두드리면, 곧 다가올 봄을 맞이하며 화분의 흙도 한번 갈아 주고요.
고양이처럼 평화롭게 뒹굴거리고,
사람답게 조금은 배시시 웃고,
봄날의 햇살처럼 차분차분
그리고 명랑하게 빛나기.
오늘은 커피 대신 따뜻한 우유를 마시고 레이의 가르랑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들어야겠어요. 혹시 녀석의 기분이 좋으면 꾹꾹이 안마를 해줄지 누가 알겠어요.
레이야, 네 생각은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