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캐러멜마키아토'로 달달함을 채우기
마음이 먼지처럼 허공을 떠다니는 날이면 나는 천천히 동네 한 바퀴를 돕니다.
골목에 있는 제법 큰 슈퍼마켓을 돌아 모퉁이에 있는 '우체국옆빵집'을 지날 때면 잠시 빵을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봉지를 들고 다니기 귀찮을 텐데 싶어 '이따가 집에 돌아올 때 사야지' 하며 그냥 지나칩니다.
여기서부터는 갈등이 생깁니다. 경사가 완만한 계단을 내려갈까? 아니면 그냥 직진을 할까?
그곳에서 오늘 마음먹고 걸으려던 '도림천'까지는 그리 멀지 않지만 나는 일부러 한 블록을 더 길게 걷습니다. 왜냐하면 그 길에는 내가 좋아하는 오래되어 낡은 풍경들이 즐비해 있기 때문입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주택들을 지나면 족히 40년이 넘어 보이는 3층짜리 빌라가 있습니다. 이름이 'oo맨숀'인 걸 보니 어쩌면 내 생각보다 더 오래되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군데군데 하얀 페인트가 벗겨져 속살이 드러난 외벽마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전깃줄에 갇힌 대여섯 개의 전기계량기가 게슴츠레한 눈을 뜨고 매달려 있습니다. 힐끔, 낡은 건물들 사이로 단지 안을 들여다보니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텃밭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심고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참 정겨운 풍경입니다.
누군가는 그게 뭘 그리 좋냐고 '너도 참 별나다'라고 하지만 나는 그냥 그런 풍경이 마음에 드는 걸 어쩌겠어요.
이제 길을 따라 다 빠져나오면 탁 트인 광장을 지나 관악산역에 도착합니다. 주말이라 그런지 관악산 일주문 앞에는 평소보다 많은 등산객들이 울긋불긋한 등산복을 입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산에 오를 준비를 합니다.
한때는 나도 저 무리의 사람들처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국의 모든 산을 찾아 누비며 발에 굳은살과 물집을 달고 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딱히 등산을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는데 뭐가 그리 바빴는지 잠시 쉬었다 가겠다 다짐한 것이 벌써 10여 년을 훌쩍 넘기고 있습니다.
물집은 마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두꺼운 양말 안에 매끄러운 스타킹을 하나 더 신으면 마찰이 줄어들어 물집이 잘 생기지 않는다고 하니 부드러움 하나가 상처를 막아주는 셈이지요.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싶어요. 굴곡이 있어야 평온이 고맙고, 갈등이 있어야 이해의 깊이가 생깁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보다 조금은 온화하게 흘려보내는 태도가 상처를 덜 남긴다는 걸
나이가 들며 점점 깨닫습니다.
오늘은 특별한 차림은 아니지만 관악산을 한번 밟아보려고 합니다. 일주문을 지나니 앞서 걷는 등산객 몇 무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두런두런 나누는 짧은 대화, 스틱 끝이 딱딱한 시멘트길을 툭툭 건드리는 마찰음까지. 그 모든 소란함이 산의 공기 속에 자연스럽게 섞여 흐르고 있을 때 나는 슬그머니 인파를 벗어나 왼쪽으로 난 작은 길로 발길을 돌립니다. 계곡 아래로 이어지는 호젓한 길을 가기 위해 커다란 징검다리를 성큼성큼 건너는 순간, 마법처럼 세상이 달라집니다. 방금 전까지 귓가를 맴돌던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가 거짓말처럼 잦아들고 뒤를 돌아봐도, 앞을 내다봐도 오직 고요뿐입니다. 마치 다른 세상으로 잠시 건너온 듯한 착각마저 드는 이런 고립감이 나는 좋습니다.
누군가와 말을 섞지 않아도 되는 곳, 타인의 시간에서 잠시 빠져나와 자연의 시간 속으로 스며드는 나만의 '비밀의 계곡'은 때때로 쓸쓸함을 동반하기도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느끼는 군중 속의 고독보다는 훨씬 견딜만합니다.
밤사이에 진눈깨비가 내린다더니 산등성이에는 희끗희끗한 잔설을 덮은 겨울이 마지막 힘을 다해 버티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나는 별 기대 없이 계곡가의 나무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발걸음을 멈춥니다.
어머낫!
버들강아지가 가지 끝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지 뭐예요. 보드라운 은회색 솜털을 달고 바람에 살짝 흔들리는 모습은 겨울빛이 아직 가시지 않은 산속에서 유난히 따뜻하게 보입니다. 봄은 요란하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 계곡가에서, 조용히 가지 끝에 솜털을 달고 그렇게 오네요.
나는 조금 더 여유로워진 마음으로 도톰한 잠바의 지퍼를 열고 다시 걷습니다. 여름이면 아이들로 북적거리는 계곡의 수영장에 도착해서는 발길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합니다.
천천히 숲을 빠져나오며 마지막에는 에어건으로 온몸의 먼지와 마음속 찌꺼기까지 탈탈 털어내니 살이 빠진 듯 몸이 가볍습니다.
다시 일주문을 빠져나와, 광장 한편에 설치된 작고 동그란 쇠구슬이 촘촘히 박힌 커다란 핸드백을 신기한 듯 한참이나 들여다봅니다. 설치미술은 잘 모르지만 참 멋지고 근사합니다.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다가 달달한 게 당겨서 지은 지 얼마 안 된 2층 카페에 들어가 키오스크에 있는 메뉴를 이리저리 살펴봅니다. 그동안은 습관처럼 아메리카노만 마셨는데 오랜만에 '캐러멜마키아토'를 주문해 봅니다. 잠시 어디에 앉을까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비어있는 창가가 보여 얼른 자리를 잡습니다. 오늘은 행운이 있는 날인가 봅니다.
청계천처럼 오래도록 도로에 덮여있다가 복개천공사로 새 단장을 한 도림천 지하도를 통해 집에 도착한 후에야 '아차, 빵을 까먹었네' 싶습니다. 아쉽지만 달달한 커피로 당분을 채웠으니 오늘은 채소를 더 많이 먹어야겠습니다.
빵아, 서운해하지 마, 너는 다음에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