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나를 생각하며
그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비양도 해변을 걷고 있었다. 제주의 많은 섬들 중에 그곳을 찾은 이유는, 섬을 한 바퀴 돌기에 너무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적당한 거리와 사람이 많지 않아 소란스러움에 마음을 뺏길 일이 없는 한적함 때문이었다.
나는 배에서 내려 시계 반대방향으로 천천히 걸었다. 따사롭게 내려앉은 햇볕 사이로 바람이 슬쩍 파고들고, 파도는 바위틈에 있는 모래를 천천히 밀어 올렸다가 다시 물러나기를 반복했다. 바다는 지나치게 투명해서 마치 사람의 속마음까지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 굴절된 풍경 속을 걷다 보니, 문득 나를 닮았다던 Y가 떠올랐다.
여고에 막 입학했던 어느 날, 여학생들에게 유난히 인기가 많아 팬클럽까지 생겼던 총각인 수학 선생님이 유심히 나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다른 반에 너랑 똑같이 생긴 애가 있더라?”
나는 누구일지 알고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굳이 찾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애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이 하도 닮았다고 해서 도대체 누굴까 궁금해서 왔다는 말과 함께.
그때 유난히 눈에 들어오던 건 가늘고 찰랑거리던 그 애의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쟤랑 내가 도대체 어디가 닮았다는 거지?’
그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우리는 곧 같은 반이 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생각이 많고 조금은 어두웠던 나와 달리 그 애는 단순하고 밝아서인지 친구도 많았고, 늘 주변이 북적거렸다. 나는 그런 그 애가 좋았다.
2교시가 끝나기 무섭게 도시락을 열어버리고, 정작 점심시간이 되면 허전해서 매점으로 달려가 ‘보름달’ 빵 두 개를 사 들고 와 서로 번갈아 내밀던 날들. 하굣길에 사 먹던 계란이 숨어 있던 핫도그와 유난히 빨갛던 떡볶이는 또 어찌 그리도 맛있었던지.
그 시절의 나는 앞날이 불안했지만, 분명히 살아서 펄떡거렸다. 볼이 빨간 사춘기 소녀답게.
그런 기억들이 왜 하필 이 바다 앞에서 떠올랐을까. 해초가 물속에서 느리게 흔들리는 모습, 파도에 밀렸다가 다시 몸을 일으키는 정형화되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리듬을 보고 있자니 전혀 상관도 없는 풍경 속에서 자꾸만 Y의 얼굴이 겹쳐졌다.
시간이 흘러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흩어졌고 그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무렵,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연락을 주고받았다. Y는 고향에 남아 식당을 하고 있었고, 남편은 학창 시절 짝사랑하며 줄기차게 따라다니던 그 대학생 오빠였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시 친구가 되었다. 그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설명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 애의 눈빛이 달라졌다. 환하게 웃을 때마다 깊어지던 보조개는 더 이상 웃음을 담지 못했고, 그 밝던 얼굴은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남편과 자주 싸운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좋아해서 따라다녔던 거, 기억해 봐.”
그 애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나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라고 화를 내다가, 다음 날이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이 늘어갈수록 나는 알아버렸다. 무언가가, 꽈배기처럼 이미 많이 꼬이고 어긋나 버렸다는 걸.
나는 바닷가 바위에 앉아 멀리서 윤슬이 춤을 추며 반짝거리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이윽고 천천히 섬을 돌아 작은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바닷바람이 그대로 스며드는 소박한 가게였다. 창가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데 그 애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너를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어.”
성격이 좋아 늘 친구들이 끊이지 않던 그 애를 내가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잘 알면서 뜬금없이 내뱉은 그 애의 말은 충격이었다. 친구끼리 왜 이기고 지는 게 필요하냐는 나의 말에 화장으로도 가리지 못한 푸석해진 얼굴로 물 한 잔을 마시던 그 애는 대답 대신 입술만 꽉 깨물었다. 그게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내 위로는 정답이었을지 모르나, 그 애에게는 넘지 못할 벽이었음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일상이 평화로울 때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상황에 몰려 마음이 뒤틀리고 흔들릴 때면 상대의 작은 빛남에도 주눅이 들고 쓸데없는 자격지심이 발동한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다.
그때, 다리에 무언가 닿아 내려다보니 털이 희끗한 작은 강아지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며 나를 핥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이렇게 쉽게 다가오다니 참 신기했다.
그런데 눈을 마주친 순간, 그 안에 묘하게 쓸쓸한 기운이 담겨 있음을 알아챘다. 이렇게 좋은 풍경에다 투명한 바다를 매일 바라보며 살더라도, 살아있다는 건 결국 조금은 외로운 일일지도 모른다.
Y와 헤어진 그날 이후로 나는 사람에게 마음의 빗장을 지르며 누가 가까이 다가와도 항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것은 나를 지키기 위한 자기 방어기제를 쓴 방식이었지만 결국 나를 더욱 고립시키는 선택이기도 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비록 쓰라림 뒤에 딱지가 떨어진 곳에 흔적은 남았지만, 이제는 그것마저 추억으로 돌릴 수 있을 만큼 나는 마음의 키가 훌쩍 자랐다.
세상을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일들이 범람하는데 어디 흉터가 그것뿐이겠는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며, 사실을 말하는 것과 상대의 입장에서 한번 더 생각하며 배려하는 것의 차이. 그것이 그 애가 내게 남긴 가장 값진 교훈이었다.
섬에서는 이상한 착각이 들 때가 많다. 수평선을 바라보면 하늘과 바다가 늘 만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늘은 하늘이고, 바다는 바다다. 아무리 가까워 보여도 서로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 그저 보는 사람의 눈에만 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이처럼 인생에도 이해할 것 같으면서도 끝내 이해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형태가 뭉개지고 시점이 뒤섞인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처럼. 처음 보면 뒤틀리고 낯설지만, 오래 바라보면 그 파편들 속에 나름의 질서와 감정이 숨어 있는 그림들.
어긋난 우정과 멀어진 마음, 그리고 홀로 남은 섬의 풍경까지. 지금 내 마음을 꺼내 놓으면 아마 그런 입체파의 그림이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섬 어딘가에는 지금도 자기만의 세상을 그리는 피카소가 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