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쾌하게 바라 봄
그 여자는 그날, 봄을 '맞이했다' 라기보다 '목격했다'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해 보였다. 마치 오래 기다린 손님이 아니라, 어느새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계절을 뒤늦게 알아차린 사람처럼.
그녀는 오랜만에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공원으로 걸어 나왔다. 햇살은 정면에서 느긋하게 쏟아졌고, 그 빛은 서두르지 않는 태도로 그녀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바람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점잖았지만, 그 끝자락에는 분명히 계절이 바뀌었다는 신호가 묻어 있었다. 겨울의 단단함 대신, 어딘가 느슨하고 말랑한 온기가 스며 있었다.
공원 한쪽에는 비둘기 떼가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마치 이유 없이 바쁜 사람들처럼 바닥을 연신 두드리며 부산스럽게 움직였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소란도 어딘가 박자가 조금씩 어긋나고, 방향도 제각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장면들은 묘하게 경쾌했다.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아이들이 몰려나왔다. 볼을 잔뜩 부풀린 채 뛰어다니는 아이들은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 숫자는 묘하게 많다 싶었다. 여섯 명 정도라면 자연스럽게 섞여 놀 수 있을 텐데, 아홉이라는 숫자 속에는 늘 어딘가 비집고 들어가지 못하는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 여자는 그 장면을 보며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저 중에 한 명쯤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마음은 혼자인 아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생각이라는 마음이 들자 곧,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자신을 책망했다.
그녀는 한동안 들고 다니느라 지문으로 얼룩진 스마트폰을 소매로 쓱쓱 문질러 닦은 후 주머니 속에 구겨져 있던 이어폰을 꺼내 입출력단자에 꽂았다. 뮤직 앱을 열고 좋아하는 곡을 모아놓은 목록을 터치해서 첫곡을 불러내 함께 걸으니 그 순간부터 봄은 조금 더 사적인 것이 되었다.
아이들의 모습이 멀어질 때쯤, 그녀는 공원 가장자리의 낡은 벤치에 앉았다. 벤치는 오래되어 표면이 조금 거칠었지만, 주변 분위기는 따스했다.
그녀는 방금까지 지나온 길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길 위에 겹겹이 쌓인 풍경들이 한꺼번에 시야에 들어왔다. 바람, 비둘기, 아이들, 햇살. 모든 것이 급하지 않았고, 서로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저 각자의 방식으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순간, 쏟아지는 주황빛 햇살 때문이었을까? 아무런 맥락도 없이 황금빛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숲이 떠올랐다. 왜 하필 오렌지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상상이 너무 선명해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짧게 웃음이 나왔다. 지나온 풍경이 '상큼함'으로 다가와 그것에 자동으로 연상되는 단어를 떠올린 것이라며, 그녀는 '봄은 오렌지야'라는 글자에 주황빛을 입히고 굵은 글씨로 획을 진하게 한 다음 강조의 의미로 밑줄을 그었다.
그녀가 공원을 빠져나와 도서관을 지나서 숲 가까이 다가가자, 갑자기 위쪽에서 ‘툭’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깜짝 놀라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 소리가 난 방향을 따라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천천히 훑어보던 순간, 거칠게 벗겨진 나무기둥 위에 매달린 작은 생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딱따구리였다.
작고 단단한 몸으로 나무를 붙든 채, 그 새는 망설임 없이 부리를 내리꽂고 있었다. ‘따다, 다닥.’ 리듬감 있는 소리가 숲 속 공기를 가르며 퍼졌다. 이미 여러 번 쪼아낸 자리에서는 나무의 속살이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고개를 들지 않으면 절대로 찾아낼 수 없는 그것은 마치 오래 숨겨둔 속마음처럼 유난히도 뽀얗고 은밀해 보였다.
그녀는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열어 딱따구리에 대하여 검색을 해보았다. 하늘을 봐야만 나뭇가지들 사이에서 겨우 보이는 손바닥만 한 딱따구리는 <딱따구리과>의 여러 새 중에서 우리나라 텃새인 오색딱따구리로, 자세히 보니 나무사이에 가려져 배 쪽에 언뜻 비친 주황빛이 특징인 듯 보였다.
딱따구리의 봄은 대단히 활동적이구나 싶어 문득 마음 한쪽이 간질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단순한 움직임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생동감이 넘쳤고, 그 생동감이 그녀의 마음 안을 가볍게 두드렸다.
산들바람이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가자, 마치 누군가 그네를 타는 그녀를 살짝 밀어준 것처럼 몸이 가벼워졌다. 어느새 그녀의 감정은 나뭇가지 사이를 타고 위로,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이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처음에는 무심히 흘려보던 눈길이었지만, 곧 모두 같은 지점을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같은 장면을 함께 보고 있었다.
아무도 약속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같은 높이에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에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나무 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때서야 비로소 분명해졌다. 봄은 어떤 거창한 사건처럼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사소한 장면들이 조용히 겹쳐지면서 완성된다는 사실이.
'이제 시작이구나.'
그녀의 봄은 그렇게,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천천히 자리를 잡아가며 선명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