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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채 Apr 05. 2016

욕조

비가 새벽부터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다. 날은 갤 생각도 없이 어둡기만 했고 안개는 발목까지 내려앉았다.

여자는 아무 표정 없이 물이 받아진 욕조 안에 발을 넣었다. 너무 뜨거워 차가운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 발도 욕조에 넣었다. 두 발에서 허리, 어깨까지 적셔가며 몸을 뉘였다. 성의 없이 올려 묶은 머리가 흘러내렸다. 젖은 머리칼은 아랑곳 않고 여자는 더 욕조 안으로 잠겼다.


똑똑


욕실 입구에 서서 열린 문을 조심스레 두드리는 소리를 향해 여자는 고개를 돌렸다. 짙은 회색의 니트를 입은 남자가 말했다.


"물 온도는 뜨겁지 않아?"


여자는 답했다. 난 더러우니까 괜찮아.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맨발로 욕실에 들어와 세면대 앞에 섰다. 여자는 누운 몸을 고쳐 앉았다. 욕조 안에 작은 파도가 일었다.

문이 열려 있는데도 이렇게 김이 서린 걸 보면 꽤나 뜨겁겠는데. 남자는 뿌연 거울을 바라보며 말했다. 여자는 다시 작은 파도를 만들었다. 뜨거운 물에 닿은 발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 망가진 나를 걱정해서 뭐해. 여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초점 없는 눈으로 욕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욕실은 뚝뚝 세면대 물기 소리만 울렸다. 한동안 둘은 말이 없었다.


"우리가 그때 한 건, 뭐였어?"


남자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헝클어진 머리의 여자는 우는지 웃는지 분간하지 못할 기괴한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까만 여자의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언젠가 너에게 말한 적이 있었지. 실제로 인어가 존재한다면 인어는 너를 닮았을거라고. 여자의 표정이 뭉개졌다. 뭉개진 얼굴 사이에서 눈물이 배었다.


남자는 아무 표정이 없다.


"우리가 한 것도, 사랑이야."


남자의 말이 끝나는 동시에 여자는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토했다. 주먹으로 욕조 물을 내려치기도 하고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감쌌다가 쥐어뜯기를 반복하며 오열했다. 남자는 여자와 자신의 한낱 치기 같았지만 순수한 진심이었던 과거를 떠올렸다. 하얀 얼굴, 가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내 한마디에도 까르르 웃던 모습. 꽃을 닮았다면 이름 없는 들꽃 같았던 순수한 여자의 첫 얼굴이 떠올랐다. 무엇이 이렇게 그녀를 시들고 까맣게 만들었을까. 남자는 우는 그녀를 말리지 않았다.


한참을 울었을까, 울던 그녀는 사그라들었다. 힘 빠진 얼굴로 파장이 이는 물 속만 쳐다보았다. 남자는 욕실을 나가지 않았다. 여자가 말했다. 그게 사랑이라면 지금은 뭐야? 억누른 목소리가 떨렸다. 남자는 담배 생각이 났다. 마지막 남은 담배를 물었다. 더운 김과 담배 연기가 얽혔다. 지금 그들의 관계처럼.


"지금도, 사랑이야."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여자는 소리쳤다. 거짓말. 옛날도, 지금도 사랑이 아니면서. 쉬어버린 목소리가 고장난 라디오같다.

죽여버릴거야. 여자가 말했다. 내가 죽으려는 걸 말려도 너는 사랑이 아닐테고, 안 말려도 사랑이 아니겠지.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가. 피우던 담배를 변기에 버렸다. 남자를 노려보던 여자는 깨진 타일 조각을 집어 들었다. 개새끼. 넌 끝까지 날 망가뜨려. 남자는 눈을 감았다. 짧은 신음소리와 함께 타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차가운 소리가 났다. 남자는 눈을 떴다.


뜨거운 물에 물감이라도 푼 듯 선명한 붉은 기가 퍼졌다. 바라볼수록 더 진하고 더 깊게 퍼졌다. 남자는 여자를 보았다. 초점이 흐려지며 팔을 덜덜 떠는 여자는 그렇게 울어도 또 흘릴 눈물이 있는지 또다시 울고 있었다. 타일 바닥 사이사이에도 빨간 선이 물기를 타고 강줄기를 이루었다. 여자는 조용했다. 악의 목소리가 다 닳아 없어진 듯 했다. 남자는 욕실에서 나와 문을 닫았다.


집은 조용했다. 더이상 물소리도 나지 않았고 찢어지는 굉음도 들리지 않았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남자는 식탁에 마시다 남긴 술을 마저 들이켰다. 그리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 숨을 몰아쉬었다. 해가 지는 건지 뜨는 건지 알 수 없는 파란 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 빗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저 소리가 내 마지막 자장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남자는 눈을 감았다.


그 집, 두 공간에는 아무런 소리도 아무런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먹구름은 가시지 않은 채 더 짙게, 더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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