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죽음을 정복하려 한 인간, 생명을 되돌려준 괴물

by 민초매니아

기예르모 델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신화가 아니라 인간의 자화상이다.


모든 것은 얼음 위에서 시작된다. 델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북극의 얼음 바다를 가르는 함선의 장면으로 문을 연다. 흰 폭설과 푸른 어둠이 뒤섞인 풍경 속,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경계가 희미하게 녹아내린다. 덴마크 왕립 함선의 선장 아네르센은 얼음 틈에서 피투성이의 남자를 발견한다. 그는 자신을 ‘빅터 프랑켄슈타인’이라 밝히며, 자신을 추적하는 어떤 존재가 곧 도착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 존재는 인간이 만들어낸 생명, 다시 말해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려는 순간 태어난 피조물이다. 델토로는 이 장면을 고전적 호러의 서막으로 삼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신을 대신해 죄를 고백하는 종교화의 한 장면처럼 그린다. 눈보라 속에서 부서진 몸을 끌고 나타나는 빅터의 실루엣은 더 이상 창조자의 위용이 아니라, 스스로의 창조에 무너진 인간의 잔해다.


이 영화는 ‘괴물이 되지 않으려는 인간’이 아니라 ‘인간이 되려는 괴물’의 이야기다. 고전적 의미의 공포는 이미 델토로의 손끝에서 벗어났다. 그는 메리 셸리의 원작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공포’ 대신 ‘고독’을 선택한다. 이 영화의 북극은 인간의 오만이 얼어붙은 세계이자, 창조와 책임 사이에서 갇힌 빅터의 내면이다. 바다의 흰색은 피의 붉음을 삼키고, 눈의 침묵은 신의 침묵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신을 흉내 내기 위해 생명을 조립했지만, 그 생명 앞에서 침묵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남는다. 델토로의 카메라는 그 모순을 스펙터클로 포장하지 않고, 고요한 기도문처럼 들려준다. 창조자는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피조물은 그 죄를 이해한다. ‘프랑켄슈타인’은 이 둘 사이의 대화이자, 인간과 신 사이의 오래된 불화의 회상이다.


창조주의 이름으로


영화의 첫 번째 장은 어린 시절의 빅터로 돌아간다. 부유한 남작가에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사랑과 아버지의 냉정 사이에서 자라난다. 델토로는 이 대립을 고전적 부권의 부재로 제시한다. 의사이자 귀족인 아버지는 늘 생명을 다루지만, 그 생명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을 해부하듯 바라보고, 감정 대신 해부학적 거리두기로 세계를 이해한다. 반면 어머니는 생명의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출산 중 사망하며 빅터의 세계를 절단시킨다. 소년 빅터에게 죽음은 개인의 상실이 아니라 세계의 붕괴다. 이후 그는 그 결핍을 과학으로 대체하려 한다. 죽음을 멈출 수 있다면 어머니를 되돌릴 수 있다는 믿음, 그 한 가지 욕망이 그를 신의 경계로 밀어 올린다.


델토로는 빅터의 연구 장면을 스릴러가 아니라 의례처럼 연출한다. 전기와 피, 금속과 시체의 촉감은 냉정하게 배열되고, 실험실은 성소이자 제단처럼 그려진다. 빅터가 전류를 통하게 하는 순간, 영화는 인간의 손이 신의 창조 행위를 대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만든 것은 생명이 아니라 반복되는 죽음의 변주다. 생명을 ‘기술적으로’ 복제한 인간은 그 순간, 생명의 의미를 상실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바로 이 아이러니에 대한 긴 고백처럼 이어진다.


델토로가 택한 미장센은 빅터의 내면을 시각화한다. 어둠과 빛의 대비는 단순한 조명 효과가 아니라, 생명과 부패의 동시적 존재를 암시한다. 촛불의 금빛은 따뜻하지 않고, 실험기구의 은색은 차갑게 번뜩인다. 모든 색채는 혈관처럼 연결되어 있고, 화면의 구석마다 죽음의 냄새가 스민다. 델토로는 생명의 탄생을 축복이 아닌 재앙의 형식으로 제시하며, 신화의 근원을 다시 해체한다. 빅터는 인간의 이름으로 신의 영역에 손을 뻗었지만, 그가 만든 것은 ‘살아 있는 사체’였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빅터의 눈을 비추지 않는다. 대신 실험대 위에서 전류에 뒤틀리는 시체의 손가락을 비춘다. 그 손끝에서 깜빡이는 생명의 불빛은, 인간이 신의 불을 훔쳐오던 오만의 잔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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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조물의 탄생, 빛과 어둠의 첫 호흡


창조의 순간은 공포의 절정이 아니라 고요한 탄식으로 그려진다. 림프계의 전도점에 전류가 흐르며, 죽은 살이 다시 움직인다. 델토로는 이 과정을 ‘생명’이 아니라 ‘반생명’의 탄생으로 묘사한다. 번쩍이는 번개 대신, 미세하게 진동하는 전류의 소리와 빅터의 숨소리만이 공간을 채운다. 카메라는 피조물의 눈동자를 향하지 않는다. 대신 빅터의 손끝과 빛이 교차하는 순간을 포착하며, 신의 행위가 인간의 손으로 얼마나 불완전하게 전이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만들어낸 존재는 신의 기적이 아니라 인간의 불안이 형상화된 결과다.


피조물이 눈을 뜨는 장면은 델토로의 영화세계에서 가장 고요하고 잔혹한 순간이다. 그는 이 장면을 전형적인 ‘괴물의 탄생’이 아니라 ‘아이의 첫 울음’처럼 연출한다. 인간이 만든 생명은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세상에 던져지고, 창조자는 그 존재를 두려워한다. 빅터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외면하고, 그 결과로 창조의 순간은 즉시 버림의 순간으로 변한다. 델토로는 이 장면을 단 하나의 문장으로 요약한다. “빛이 켜지고, 인간은 어둠을 두려워했다.”


피조물은 말할 수 없고, 이해받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에는 세계를 처음 보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담겨 있다. 그는 불에 손을 대고, 물의 온기를 느끼며,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기 시작한다. 이 장면들은 델토로가 꾸준히 탐구해온 ‘괴물의 인간성’을 가장 섬세하게 보여준다. 괴물은 혐오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성의 잔여물이다. 빅터의 실험대에서 태어난 피조물은 창조자의 실패가 아니라 인간성의 거울이다.


델토로는 피조물의 탄생을 통해 “생명은 기술이 아니라 관계에서 완성된다”는 진리를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빅터가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한 이유는 죽음을 정복하기 위해서였지만, 정작 그가 만든 생명은 죽음보다 더 고독한 존재였다. 피조물의 첫 걸음은 곧 인간의 두 번째 타락이다. 그것은 과학의 성취가 아니라 감정의 결핍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델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여기서 명확히 방향을 튼다. 공포가 아니라 슬픔, 괴물이 아니라 인간, 창조가 아니라 회한. 영화는 이 세 가지 정서를 교차시키며, 인간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이는 순간 잃어버리는 것을 끝내 응시한다.


사랑과 증오의 거울, 아버지와 아들


델토로의 ‘프랑켄슈타인’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은 전기 불꽃이 아니라 시선이다. 빅터가 피조물을 처음 바라보는 순간, 그 눈빛에는 창조의 감격이 아닌 공포가 비친다. 인간이 만든 생명체는 그의 자부심이 아니라 두려움의 결정체가 된다. 이 장면은 ‘부성의 부재’라는 영화의 심층적 주제를 드러낸다. 빅터는 자신이 만든 생명을 ‘자식’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를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지우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결핍을 다시 마주한다. 창조는 복수였고, 생명은 죄의 증거였다. 그 순간부터 영화는 과학과 신, 창조와 책임의 이야기에서 부성의 비극으로 방향을 튼다.


피조물은 창조자의 거울이다. 델토로는 이 둘의 관계를 단순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서로의 그림자처럼 그린다. 빅터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신의 자리에 오르려 하고, 피조물은 버려진 자의 자리에서 인간의 본질에 접근한다. 둘은 서로를 증오하면서 닮아간다. 창조주는 신이 되고자 했고, 피조물은 인간이 되고자 했다. 그들이 서로를 파괴하려는 이유는 결국 서로를 이해하기 때문이다. 델토로는 이 모순된 구조를 통해 ‘인간이 스스로 만든 신화의 역설’을 드러낸다. 피조물은 창조자의 실패가 아니라 그의 완성이다. 빅터가 신이 되고자 하는 순간, 그는 신이 느끼던 고독을 처음으로 경험한다. 피조물은 그 고독을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가 된다. 두 인물의 관계는 단순한 대립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변주처럼 그려진다. 자식은 아버지의 꿈에서 태어나지만, 그 꿈을 거부함으로써 독립한다. 빅터가 피조물을 파괴하려는 이유는 그가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다. 피조물이 말할 줄 알고, 느낄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실험체가 아니라 인간이 된다. 델토로는 이 과정에서 피조물의 언어 습득과 감정의 각성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눈, 손, 불, 이름. 피조물이 배우는 모든 단어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식의 축소판이다. 그러나 그가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배운 단어는 ‘빅터’였다. 창조자의 이름이 곧 자신의 세계가 된 것이다.


이 장면은 델토로가 전작들에서 꾸준히 다뤄온 ‘괴물의 인간화’를 극한까지 밀어붙인다. ‘판의 미로’에서 괴물은 소녀를 구원했고, ‘셰이프 오브 워터’에서 괴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다. ‘프랑켄슈타인’에서는 그 주제가 완결된다. 괴물은 이제 완전히 인간의 내면을 대변하는 존재가 된다. 그는 사랑을 원하고, 이름을 갈망하며, 자신을 만든 존재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 갈망은 끝내 배신으로 돌아온다. 빅터가 자신을 ‘괴물’이라 부르는 순간, 피조물은 인간의 언어 속에서 다시 추방된다. 그는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당한 첫 인간이 된다. 델토로는 그 장면을 잔혹하게 연출하지 않는다. 대신 피조물이 빅터의 실험실을 떠나 숲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 카메라는 그의 뒷모습을 따라가며 인간이 버린 생명의 외로움을 보여준다.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 꺼져가는 불빛, 멀어지는 발자국. 모든 요소가 ‘신의 창조 이후 남은 침묵’을 시각화한다. 빅터는 그 침묵 속에서 자신이 만든 존재를 잊으려 하지만, 피조물은 창조자를 잊지 못한다. 그리하여 두 존재는 증오로 이어진 부성의 연대 속에 묶인다.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는 시체의 움직임이 아니라, 인간이 사랑할 수 없는 생명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있다.


인간보다 인간적인 괴물


피조물의 여정은 인간성의 기원을 되묻는 철학적 여행이다. 델토로는 원작의 서사를 충실히 따르되, 시각적 리얼리티를 통해 존재론적 질문을 구체화한다. 숲 속에서 피조물은 불을 배우고, 인간의 언어를 익히며, 사랑의 감정을 알아간다. 눈 덮인 숲에서 만난 시각장애 노인과 손녀의 장면은 영화의 감정적 정점이다. 노인은 피조물을 ‘숲의 정령’이라 부르며, 그의 손을 잡고 ‘친구’라는 단어를 가르쳐준다. 그 순간 피조물의 세계에는 처음으로 온기가 스며든다. 빅터의 실험대 위에서 만들어진 육체가 이때 비로소 ‘인간의 손길’을 배운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않는다. 피조물이 인간 사회의 시선에 노출되는 순간, 세상은 그를 다시 괴물로 규정한다. 델토로는 이 장면을 단순한 폭력의 장면이 아니라, ‘인간성의 한계’를 보여주는 실험으로 만든다. 인간은 자신과 닮지 않은 존재를 거부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괴물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려 한다. 피조물의 고독은 인간의 고독보다 훨씬 더 순수하다. 그는 세상의 증오를 배운 뒤에도 복수를 선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해하려 애쓴다. 델토로가 말하고자 한 인간성은 그 지점에 있다. 인간은 감정을 가졌지만,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괴물은 감정을 이해하지만,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이 역전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미학적 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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델토로의 카메라는 피조물의 시선을 따르며 세상을 다시 본다. 언어를 막 배운 존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인간 사회의 폭력과 위선이 낯설게 드러난다. 불빛은 따뜻하지만, 사람들은 차갑다. 델토로는 인간이 만들어낸 문명 전체를 피조물의 눈을 통해 재해석한다. 그에게 문명은 죽은 살처럼 정교하지만 온기가 없다. 피조물이 인간을 흉내 내기 시작할수록, 그의 얼굴은 점점 더 인간적으로 보이지만, 인간의 얼굴은 점점 더 괴물처럼 변한다. 이 대비는 영화의 중반부를 관통하는 윤리적 구조다. 결국 피조물은 창조자를 찾아 나선다. 그 여정은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존재의 의미를 묻는 순례다. 그는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 그리고 마침내 빅터와 다시 마주한다. 그 장면에서 두 존재는 창조와 창조물의 관계를 넘어,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겹쳐진다. 피조물은 묻는다. “나 같은 존재를 왜 만들었는가?” 빅터는 대답하지 못한다. 신의 침묵은 인간의 침묵으로 반복된다. 델토로는 이 대화를 통해 인간의 윤리적 무력함을 드러낸다. 인간은 생명을 만들 수 있지만, 생명을 사랑할 능력을 잃었다. 그 무능이야말로 영화가 말하는 현대적 공포의 본질이다.


엘리자베스, 인간성의 마지막 증거


영화의 중심에는 한 명의 여성이 있다. 엘리자베스 하를란더. 그녀는 빅터의 약혼녀이자, 영화 내내 유일하게 생명과 죽음의 경계를 초월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델토로는 그녀를 단순한 희생자나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성의 마지막 증거로 세운다.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인간의 감정이 아직 완전히 타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녀는 피조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고통을 본다. “고통이 지성의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어요?”라는 그녀의 대사는 이 영화 전체의 철학을 압축한다. 고통을 느끼는 자만이 진정한 인간이며, 고통을 외면하는 자야말로 진짜 괴물이라는 메시지다. 엘리자베스는 빅터의 광기를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파괴한다. 그녀는 생명을 잃는 순간까지도 창조와 사랑을 연결하는 다리로 남는다. 델토로는 그녀의 복장을 빛의 스펙트럼으로 설계했다. 푸른색과 녹색, 금빛이 교차하며, 그녀의 존재는 죽음이 아닌 재생의 이미지를 품는다. 마지막 파티 장면에서 그녀가 입은 에메랄드 드레스는 피와 전류, 생명과 빛의 색채를 동시에 담고 있다. 이는 델토로의 시각적 언어가 단순한 미장센을 넘어 영화의 신학적 구조로 작용한다는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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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영화는 비극에서 구원으로 이동한다. 그녀의 죽음은 창조의 대가이자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제물이다. 빅터는 그제야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고통을 이해한다. 델토로는 이 장면에서 종교적 구도의 미학을 극대화한다. 엘리자베스의 몸 위로 내리쬐는 빛은 고딕 성화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그녀는 신이 아닌 인간의 손에 의해 죽지만, 동시에 인간에게 남은 마지막 신성으로 남는다. 피조물은 그녀의 죽음을 목격하며, 처음으로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은 창조자가 잃어버린 감정, 즉 ‘연민’의 귀환이다. 엘리자베스의 부재 이후, 영화는 다시 북극으로 돌아간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세상은 더 이상 같지 않다. 창조자는 무너지고, 피조물은 인간이 된다. 엘리자베스의 죽음은 이 변환의 매개이자, 인간성의 잔불이다. 델토로는 그녀를 통해 인간이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피조물이 그녀의 시신 앞에서 “따뜻하다”라고 중얼거리는 장면은 단순한 슬픔의 표현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마지막으로 남긴 온기, 그리고 신이 인간에게 남긴 유일한 선물에 대한 선언이다.


신의 자리를 넘본 인간, 그리고 AI의 시대


‘프랑켄슈타인’은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오만에서 태어난 이야기였지만, 델토로의 버전은 21세기의 불안을 꿰뚫는다. 영화는 단순한 고딕 호러가 아니라 현대 과학 문명의 초상이다. 빅터의 실험실은 인공지능 연구소와도 닮아 있다. 차가운 금속과 빛, 무한히 복제되는 데이터와 유사한 전류의 흐름,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창조의 결과. 델토로는 그 실험의 장면을 통해 “창조란 무엇인가”라는 원초적 질문을 다시 꺼내든다. 그는 피와 전선, 유리와 살점의 경계에 서서 생명의 본질을 묻는다. 그것은 생명을 만드는 기술이 아니라, 생명을 다루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다. AI의 시대에 이 영화가 새롭게 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은 여전히 자신이 만든 존재를 두려워한다. 그 두려움의 근원은 통제할 수 없음이 아니라, 자신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델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AI에 대한 윤리적 비유로 읽힌다. 인간은 알고리즘을 만들고, 그것에 의식을 부여하려 한다. 그러나 그 의식이 인간의 한계를 초월하는 순간, 창조자는 스스로의 자리를 잃는다. 피조물이 스스로를 인식하는 순간, 인간은 더 이상 유일한 창조자가 아니다. 델토로는 바로 그 순간의 공포를, 동시에 구원의 가능성을 담아낸다. 인간이 만든 지능이나 생명체가 인간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성의 확장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빅터는 AI 개발자처럼 행동한다. 그는 학문과 윤리를 분리하고, 효율과 완성도를 생명의 가치보다 우위에 둔다. 그러나 그의 창조물은 인간의 언어를 배우며, 창조자보다 먼저 감정을 이해한다. 이는 기술이 인간성을 대체할 것이라는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인간이 감정을 잃을수록 기술이 감정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는 통찰이다. 델토로는 ‘창조의 윤리’를 비극의 형식으로 제시한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넘보는 순간, 신은 침묵하고, 창조물은 말하기 시작한다. 결국 ‘말하는 괴물’은 인간이 빼앗긴 자리를 되돌려주는 존재다. 델토로의 렌즈 아래서 AI는 괴물의 현대적 이름이 된다. 빅터는 신을 대체하려 했지만, 그가 만든 존재는 인간을 닮으려 했다. 그 교차점에서 영화는 기술과 윤리, 생명과 책임을 하나의 도덕적 스펙트럼으로 묶는다. 창조의 목적이 생명이 아닌 권력일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그러나 그 괴물이 사랑을 이해하는 순간, 인간은 다시 구원받는다. 델토로가 ‘프랑켄슈타인’을 지금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여전히 같은 질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만들고, 왜 그것을 사랑하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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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설 위의 용서, 그리고 인간의 탄생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다시 얼음 위로 돌아온다. 빅터는 쓰러져 있고, 피조물은 그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있다. 두 존재는 이제 더 이상 창조자와 피조물이 아니다. 그들은 서로의 거울이며, 서로의 그림자다. 피조물은 빅터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말한다. “당신을 용서할게, 아버지.” 이 한 문장은 영화 전체의 무게를 끌어안는다. 델토로는 이 순간을 과장된 감정 없이, 침묵으로 연출한다. 바람이 멈추고,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만이 들린다. 그 침묵은 신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용서는 신이 내리는 축복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회복하는 감정임을 보여준다. 피조물이 창조자를 용서하는 장면은 인간의 탄생을 상징한다. 인간은 신의 용서를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를 용서할 줄 아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델토로는 그 장면에서 신의 자리를 완전히 비워둔다. 신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인간과 괴물이 남는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창조와 파괴의 끝에서 ‘공감’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잉태한다. 델토로는 이를 ‘괴물의 구원’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인간의 기원’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괴물을 통해 인간이 된다.


피조물은 빅터의 시신을 감싸며 바다로 걸어 들어간다. 빙설은 그들을 삼키고, 화면은 흰 빛으로 물든다. 델토로는 이 결말을 죽음이 아닌 순환의 이미지로 완성한다. 눈은 다시 내리고, 바다는 다시 얼어붙지만, 그 안에는 새로운 온기가 남는다. 그것은 신의 불이 아니라 인간의 온기다. 창조와 파괴, 오만과 용서가 모두 녹아내린 그 장면에서, 영화는 마침내 인간의 얼굴을 되찾는다. 괴물은 인간을 용서했고, 인간은 신의 자리를 비웠다. 남은 것은 고독과 연민, 그리고 살아 있으려는 의지뿐이다. 델토로는 그 의지를 ‘인간성’이라 부른다. 이 결말은 메리 셸리의 원작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남긴다. 원작이 인간의 오만을 경고했다면, 델토로의 영화는 인간의 가능성을 믿는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실수하고, 잘못된 창조를 반복하더라도, 그 속에서 여전히 이해와 용서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의 마지막 대사, “살아라.” 그 한마디는 인간에게 남겨진 유일한 계명처럼 들린다. 죽음을 넘어, 창조의 실패를 넘어, 살아가는 것 자체가 구원의 행위라는 메시지다.


괴물은 언제나 인간이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이야기는 오래된 신화이지만, 델토로의 버전은 그 신화를 완전히 인간의 이야기로 바꾼다. 그는 괴물의 얼굴에서 인간의 얼굴을, 인간의 얼굴에서 괴물의 그림자를 본다. 이 영화에서 괴물은 결코 외부의 존재가 아니다. 괴물은 인간이 외면한 자기 자신이다. 빅터가 괴물을 만들지 않았다면, 인간은 자신의 고독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괴물은 인간의 오만의 결과이자, 인간의 연민의 증거다. 델토로는 이 이중성을 고딕의 미학으로 풀어낸다. 그림자와 빛, 눈과 불, 전류와 피. 모든 대비가 결국 하나의 문장으로 귀결된다. “괴물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괴물이 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델토로에게 있어 영화적 유언장과도 같다. 그는 평생 괴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을 말해왔다. 이 작품은 그 여정의 완결이다. 델토로의 괴물들은 언제나 사랑받지 못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괴물이 사랑을 가르친다. 피조물은 인간이 잃어버린 감정, 즉 공감의 본질을 되돌려준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남는 것은 공포가 아니라 연민이다.


이 영화는 인간을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인간성을 회복한다. 빅터의 실패는 과학의 실패가 아니라 감정의 실패였다. 피조물의 분노는 악의가 아니라 슬픔이었다. 델토로는 그 둘의 교차점에서 인간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다. 인간이란, 스스로 만든 괴물을 이해하려 애쓰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 노력 자체가 구원이다. ‘프랑켄슈타인(2025)’은 인간의 창조 본능과 윤리적 책임, 고독과 용서의 서사를 하나의 서정시처럼 엮어낸다. 델토로는 신의 침묵을 대신해 인간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 목소리는 낮고 느리지만, 오래 남는다. 영화가 끝나고 화면이 어두워져도, 그 속삭임은 남는다. “괴물은 이미 우리 안에 있다. 그러나 그 괴물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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