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에서 프란세지냐 한 접시의 자유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20화 -

by 마르코 루시

기차가 상벤투역(São Bento)에 멈춰 섰다.


플랫폼에 내리는 순간, 숨이 멎었다.
역 전체가 파란색이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아줄레주 타일.
수천, 수만 개의 푸른 조각들이
포르투갈의 역사를 그려내고 있었다.


전쟁, 축제, 일상의 풍경.
타일 위에서 사람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리스본에서도 아줄레주를 봤지만,
이건 차원이 달랐다.
역이 아니라 미술관 같았다.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목적지로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없었다.
그냥 서서, 올려다보고, 감탄했다.


이곳이 포르투구나.
리스본과는 또 다른 도시.
내 도발의 두 번째 목적지.


역을 빠져나와 언덕을 내려갔다.


포르투는 리스본보다 작았다.
아담하고, 낡았고, 소박했다.
관광객들로 북적이지 않았다.
골목에는 현지인들의 일상이 흘러가고 있었다.


빨래가 창문에 걸려 있었고,
할머니들이 문 앞에 앉아 수다를 떨었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녔다.


걸을수록 강 냄새가 짙어졌다.
도우루강(Douro)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골목이 끝나는 곳에서 시야가 확 트였다.
리베이라(Ribeira) 광장.
그리고 그 너머로, 도우루강.


강이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테주강보다 좁았지만, 더 친밀했다.
강 건너편에는 와인 셀러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 위로 동 루이스 다리(Dom Luís I)가 아치를 그리고 있었다.


배가 고팠다.
리스본에서 아침을 거르고 기차에 올랐다.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강변을 따라 걸었다.
식당들이 줄지어 있었다.
테라스 자리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커플이거나 가족이었다.


서울에서라면 주저했을 것이다.
혼자 들어가도 되는 곳인지,
눈치 보이지 않을지,
자리가 어색하지 않을지.


그런 생각들이 스쳤다.
발걸음이 느려졌다.
잠깐, 진짜 들어가?


작은 식당 앞에서 멈췄다.
강이 보이는 창가 자리가 하나 비어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안을 들여다봤다.
커플들, 가족들, 친구들.
혼자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심장이 움찔했다.
서울의 내가 속삭였다.
그냥 카페 가서 샌드위치나 먹어.
혼자 식당은 좀 그렇잖아.


손이 문손잡이 앞에서 멈췄다.


그때 안에서 점원과 눈이 마주쳤다.
중년 여자였다.
웃으며 손짓했다.
들어오라는 뜻 같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밀었다.

"Boa tarde."
그녀가 인사했다.
좋은 오후라는 뜻인 것 같았다.

"Mesa para uma pessoa?"
한 명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손가락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앉았다.

의자가 삐걱거렸다.
어디선가 포르투갈어가 웅성거렸다.
옆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 소리들이 공간을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테이블보는 체크무늬였고,
가장자리가 약간 닳아 있었다.
오래된 가게라는 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도우루강이 보였다.
물 위로 작은 배들이 떠다녔다.
포트 와인을 실어 나르던 라벨루(Rabelo) 배들.
이제는 관광용으로만 쓰인다고 어디서 읽었다.


햇살이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유리컵에 담긴 물이 반짝였다.


메뉴판이 왔다.
포르투갈어와 영어가 함께 적혀 있었다.
천천히 읽었다.
아무도 재촉하지 않았다.


프란세지냐(Francesinha).

포르투의 명물이라고 했다.
빵 사이에 고기를 겹겹이 쌓고,
치즈를 덮어 오븐에 굽고,
매콤한 소스를 부어 먹는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엄청난 크기와 칼로리.

서울에서라면 절대 시키지 않았을 메뉴.

"이거 혼자 먹기엔 너무 많지 않아?"
"그냥 샐러드 먹을래."
"다이어트 중이거든."

늘 그렇게 말했다.

정말 원하는 것 대신,
상대방 눈치를 보며 고른 메뉴들.

하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내 선택을 보고 있지 않았다.
칼로리를 계산할 사람도,
많이 먹는다고 눈치 줄 사람도.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켰다.
"Francesinha, por favor."

점원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 para beber?"
마실 것은 뭘로 하겠냐고.

"Vinho tinto."

레드 와인.
점심부터 와인이라니.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
하지만 여기서는 자연스러웠다.


와인이 먼저 나왔다.

작은 카라페에 담긴 하우스 와인.
도우루 지역 와인이라고 했다.
포트 와인의 고향.

잔에 따랐다.
진한 루비색이 햇살에 투명하게 빛났다.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 베리향이 퍼졌다.
부드럽고, 진하고, 따뜻했다.


창밖을 바라봤다.
강 위로 갈매기가 날았다.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강 건너편 언덕 위로 주황색 지붕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혼자였다.
테이블 맞은편은 비어 있었다.
대화할 사람도, 맞춰야 할 분위기도 없었다.

그런데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충만했다.


서울에서 혼자라는 게 가끔 부끄러웠다.
누가 볼까 봐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와인을 홀짝이며 강을 바라봤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 순간에 있었다.


프란세지냐가 나왔다.

접시가 테이블에 놓이는 순간, 눈이 커졌다.
사진보다 훨씬 컸다.
치즈가 녹아내려 접시 가장자리까지 흘러넘쳤다.
주황빛 소스가 빵을 적시고 있었다.

그 위에 계란 프라이 하나.
옆에는 감자튀김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열기가 얼굴까지 올라왔다.
치즈와 고기가 섞인 냄새.
매콤한 소스의 향.

"Bom apetite."
점원이 말했다.
맛있게 먹으라는 뜻인 것 같았다.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녹은 치즈를 자르자 속이 보였다.
빵, 햄, 소시지, 스테이크.
겹겹이 쌓인 고기들.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뜨거웠다.
치즈가 입천장에 닿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매콤하고, 짭짤하고, 고소했다.
소스가 빵에 스며들어 촉촉했다.
고기는 부드러웠고, 치즈는 끈적하게 늘어났다.

눈을 감았다.


이게 프란세지냐구나.
포르투 사람들이 사랑하는 맛.
혼자 먹기엔 너무 크다고 생각했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기름진 입안을 와인이 씻어냈다.
다시 프란세지냐를 베어 물었다.


누구 눈치도 볼 필요 없었다.
많이 먹어도, 천천히 먹어도,
소스를 빵으로 싹싹 닦아 먹어도.


이 테이블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었다.

접시가 거의 비었다.


배가 불렀다.
아니,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후회는 없었다.

마지막 남은 와인을 마셨다.
잔 바닥에 약간의 침전물이 보였다.
그것마저 마셨다.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조금 기울어 있었다.
강물 색이 조금 진해졌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한 시간? 아니, 그 이상.
한 끼 식사에 이렇게 오래 앉아 있은 적이
서울에서는 없었다.


전에는 점심시간은 정해져 있었다.
한 시간, 아니면 그보다 짧게.
빨리 먹고, 커피 마시고, 돌아가야 했다.
동료들과 함께 먹으면서도
대화에 신경 쓰고, 분위기에 맞추고.


하지만 여기서는 시간이 다르게 흘렀다.
한 끼 식사가 하나의 의식이었다.
음식을 음미하고, 풍경을 바라보고,
그냥 존재하는 시간.


계산서를 달라고 손짓했다.
"A conta, por favor."
어젯밤 외웠던 문장.

점원이 웃으며 계산서를 가져왔다.
프란세지냐, 와인, 물.
15유로.


서울 점심값과 비슷했다.
하지만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돈을 쓴 게 아니라,
시간을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식당을 나왔다.

강변을 천천히 걸었다.
배가 불러서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게 또 좋았다.


벤치에 앉았다.
강을 바라봤다.


서울에서는 혼자 밥 먹는 게 두려웠다.
불쌍해 보일까 봐, 외로워 보일까 봐.

회사 근처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을 때,
늘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화면을 보는 척하면서
사실은 아무것도 보지 않았다.
그냥 혼자가 아닌 척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혼자 먹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특권처럼 느껴졌다.


내가 원하는 자리에 앉고,
내가 원하는 메뉴를 시키고,
내가 원하는 속도로 먹고,
내가 원하는 만큼 머무는 것.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는 식탁.
그것이 이렇게 자유로운 것인 줄 몰랐다.


강 위로 배 한 척이 지나갔다.
라벨루 배.
와인 통들이 그려진 깃발이 펄럭였다.


포르투에서의 첫 식사.
혼자였지만,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먹은 어떤 식사보다
풍요로웠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혼자여서 더 맛있었다고.
아니, 혼자였기 때문에 맛있었다고.

이 도시가 벌써 좋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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