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21화 -
동 루이스 다리 위에 섰다.
2층 구조의 철제 다리.
위층은 메트로가 다니고, 아래층은 차들이 지나갔다.
나는 위층 보행로를 걷고 있었다.
바람이 거셌다.
난간을 잡지 않으면 휘청거릴 것 같았다.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아찔했다.
도우루강이 60미터 아래에서 흐르고 있었다.
리스본의 테주강보다 좁았지만, 더 깊어 보였다.
협곡 사이를 흐르는 강처럼.
라벨루 배들이 강 위에 떠 있었다.
납작하고 넓은 목선.
예전에는 상류 포도밭에서 와인 통을 실어 날랐다고 했다.
이제는 관광객을 태우고 유람하는 배가 되었지만,
뱃전에 그려진 와인 회사 로고들이 역사를 말해주고 있었다.
다리를 건너는 데 10분이 걸렸다.
바람과 싸우며 걷는 10분.
하지만 멈춰 서서 강을 내려다보는 시간까지 합치면
거의 30분이 흘렀다.
다리 끝에서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빌라 노바 드 가이아.
강 건너편 언덕.
언덕 전체가 와인 셀러였다.
산데만, 그라함, 테일러, 페레이라, 크로프트.
수백 년 된 이름들이 지붕 위에 새겨져 있었다.
붉은 기와 사이로 거대한 간판들이 솟아 있었다.
리스본의 그 밤이 떠올랐다.
바이샤 골목의 작은 바.
젊은 바텐더가 따라준 세 잔의 포트 와인.
화이트, 루비, 토니.
그때 처음 알았다.
포트 와인이 포르투에서 왔다는 것을.
Porto, Port, 같은 이름이라는 것을.
그 와인의 고향에 서 있었다.
리스본에서는 잔으로 마셨다.
여기서는 그 잔이 태어난 곳을 보고 있었다.
강을 따라 내려온 포도가 이 언덕에서 숙성되고,
수십 년을 기다린 후에야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
관광객들이 북적이는 대형 셀러들을 지나쳤다.
줄 서서 투어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이드가 영어로 설명하는 소리.
시음 세트를 들고 사진 찍는 커플들.
그런 곳은 아니었다.
뭔가 다른 곳을 찾고 싶었다.
언덕 위쪽으로 올라갔다.
관광객이 줄어들었다.
골목이 좁아졌다.
빨래가 창문에 걸려 있었고,
고양이가 담벼락 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작은 셀러 앞에서 멈췄다.
간판이 낡아 있었다.
페인트가 벗겨지고, 글씨가 희미했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안에서 서늘한 공기가 흘러나왔다.
오래된 나무와 습기, 그리고 발효의 향.
들어갈까.
망설였다.
영어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혼자 들어가면 어색할 것 같았다.
서울의 내가 속삭였다.
그냥 큰 데 가서 영어 투어 들어.
여기는 현지인들 오는 곳 같잖아.
하지만 어제 식당 문을 밀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망설였다.
그때도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들어갔고, 후회하지 않았다.
숨을 들이쉬었다.
문을 밀었다.
안은 어두웠다.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햇빛에서 갑자기 그늘로 들어오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서늘함이 피부를 감쌌다.
밖은 4월의 따스한 햇살이었는데,
여기는 지하실 같았다.
온도가 확연히 달랐다.
눈이 적응하자 공간이 보였다.
생각보다 작았다.
카운터 하나, 의자 두 개.
벽에는 오래된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서 남자들이 오크통을 굴리고 있었다.
라벨루 배에 통을 싣고 있었다.
수십 년 전, 어쩌면 백 년 전의 풍경.
카운터 뒤에 노인이 앉아 있었다.
백발이었고,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신문을 읽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신문을 접는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톱 밑에 보랏빛 얼룩이 배어 있었다.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색.
수십 년간 와인을 다룬 손이었다.
눈이 마주쳤다.
"Boa tarde." 좋은 오후
그가 말했다.
리스본에서 배운 인사.
"Boa tarde."
따라 말했다.
발음이 어색했지만 그가 웃었다.
주름 사이로 눈이 반짝였다.
그가 포르투갈어로 뭔가를 물었다.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손으로 와인 마시는 시늉을 했다.
잔을 들고 입에 가져가는 동작.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에서 일어나 안쪽을 가리켰다.
따라오라는 손짓.
셀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천장이 낮은 통로.
돌벽에서 습기가 배어 나왔다.
발소리가 울렸다.
그의 발소리, 내 발소리.
그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통로가 끝나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오크통들이었다.
거대한 통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하나가 사람 키의 두 배는 됐다.
수십, 수백 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노인이 뭔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어.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손짓을 보았다.
오크통을 쓰다듬는 손.
나뭇결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
몇십 년을 이 통과 함께한 손.
강을 그리는 팔.
도우루강 상류에서 포도가 자라는 모양.
배에 실려 내려오는 흐름.
이 셀러에 도착해 숙성되는 과정.
라벨루 배를 설명할 때 그의 눈이 빛났다.
옛날에는 자기 아버지도 그 배를 탔다고,
아마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손짓이 커지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알아듣지 못해도 느껴졌다.
이 사람은 이 일을 사랑한다는 것.
이 셀러를, 이 강을, 이 도시를 사랑한다는 것.
서울에서는 같은 말을 써도 통하지 않았다.
여기서는 다른 말을 쓰는데 통했다.
작은 방에 도착했다.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벽에 선반이 있었고, 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먼지가 쌓인 것들, 라벨이 손으로 쓰인 것들.
노인이 선반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뭔가를 고르는 것 같았다.
한 병을 꺼냈다.
다른 병들보다 먼지가 더 많았다.
조심스럽게 코르크를 뽑았다.
잔 하나를 꺼내 닦았다.
천으로 정성스럽게.
그리고 와인을 따랐다.
아주 조금만.
잔을 건네며 눈을 마주쳤다.
말이 없었다.
받아서 향을 맡았다.
리스본에서 마신 것과 달랐다.
그때는 세 잔을 차례로 마시며 맛을 비교했다.
화이트는 이렇고, 루비는 저렇고.
바텐더가 영어로 설명해 줬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설명이 없었다.
비교할 대상도 없었다.
그냥 이 한 잔.
한 모금 마셨다.
입안에서 시간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처음엔 달콤했다.
그 뒤에 쓴맛이 왔다.
쓴맛이 지나가자 따뜻함이 남았다.
목을 타고 내려가는 온기.
눈을 감았다.
이게 뭔지 몰랐다.
몇 년산인지, 어떤 품종인지.
하지만 특별하다는 건 알았다.
이 노인이 아무에게나 따라주는 술이 아니라는 것도.
눈을 떴을 때, 그가 웃고 있었다.
내 표정을 보고 있었다.
만족스러운 미소.
말이 필요 없는 순간이었다.
"Obrigada."
감사하다고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천천히, 의미를 담아서.
마음에서 우러난 환영.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셀러를 나왔다.
오후 햇살이 눈부셨다.
어둠에 있다가 나오니 세상이 하얗게 보였다.
눈이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강이 보이는 벤치를 찾아 앉았다.
도우루강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라벨루 배 한 척이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뱃전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노인과 얼마나 함께 있었을까.
한 시간? 그 이상?
알아들은 단어는 열 개도 안 됐다.
나눈 대화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통했다.
오크통을 쓰다듬던 손.
라벨루 배를 설명하던 눈빛.
특별한 잔을 건네던 미소.
가슴에 얹은 손.
서울에서는 말을 많이 했다.
카톡으로, 이메일로, 전화로.
하루에 수십, 수백 개의 메시지.
읽씹 당할까 봐 조심하고,
오해받을까 봐 단어를 고르고,
눈치 보며 이모티콘을 붙이고.
말은 넘쳐났지만 마음은 닿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는 말이 없어도 통했다.
아니, 말이 없어서 더 통했는지도 몰랐다.
언어라는 도구가 없으니 다른 것들이 보였다.
표정, 눈빛, 손길.
그 사람의 진심.
강 위로 갈매기가 날았다.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리스본의 테주강에서도 갈매기가 울었다.
하지만 여기 소리는 조금 달랐다.
더 가깝고, 더 선명했다.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리를 건너 포르투 쪽으로 향했다.
입안에 아직 그 와인의 여운이 남아 있었다.
이름도 모르는 와인.
하지만 그 노인의 얼굴은 기억할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도 기억할 것 같았다.
말보다 진심이 먼저라는 것을.
언어보다 마음이 앞선다는 것을.
다리 위에서 다시 한번 강을 내려다봤다.
라벨루 배가 저 멀리 작아지고 있었다.
노인의 손이 떠올랐다.
가슴에 얹었던 그 손.
보랏빛 얼룩이 배어 있던 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지금까지 들은 어떤 말보다 오래 남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