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 하루의 가치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22화 -

by 마르코 루시

월요일 아침이다.


시계를 보지 않았다.
몇 시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알람을 맞춰두지 않았으니까.


천장을 바라봤다.
하얀 회벽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햇살이 창문 틈으로 비스듬히 들어와
금을 따라 선을 그렸다.


숙소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트램 지나가는 소리.
누군가 빨래를 널면서 흥얼거리는 노래.
멀리서 들려오는 강의 뱃고동.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그냥 이대로 누워 있기로 했다.


가방 옆에 가이드북이 있었다.


어젯밤 숙소 로비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포르투의 명소, 추천 코스, 맛집 리스트.
어제는 펼쳐보지도 않았다.


손을 뻗어 책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안 하기로 했다.

계획도, 일정도, 목적지도 없이.
그냥 이 하루를 흘려보내기로.


서울이었다면 불안했을 것이다.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뭔가를 해야만 하루를 산 것 같아서.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었다.
자유로운 선택.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갔다.
창문을 열었다.
도우루강이 보였다.
오늘따라 물빛이 더 푸르게 빛났다.


바람이 들어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딱 좋은 온도.


다시 침대에 누웠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배가 고팠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몸이 나른했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렸다가 다시 내렸다.


천장의 금을 따라가던 햇살이 조금씩 움직였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
하지만 재촉하지 않았다.


어제 노인의 와인 셀러가 떠올랐다.


오크통들이 줄지어 누워 있었다.
수십 년을 그렇게 누워서 기다린다고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시간이 지나가기를.


그 통들은 무엇을 느낄까.
어둡고 서늘한 공간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 동안.


기다림도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
비어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채워지고 있다는 것.


나도 지금 그런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가 천천히 채워지고 있었다.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샤워도 대충 했고, 옷도 아무거나 입었다.
거울도 보지 않았다.
누가 볼 것도 아니었으니까.


골목 모퉁이에 빵집이 있었다.


문이 열려 있었고,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들어갔다.


카운터에 세 명이 서 있었다.
모두 에스프레소 잔을 들고 있었다.
정장 입은 남자, 작업복 입은 남자.
아무도 앉지 않았다.
그냥 서서 마셨다.


뒤에 섰다.


잔이 나왔다.
뜨겁고 진했다.
한 모금씩 천천히.


리베이라 광장으로 내려갔다.
관광객들이 북적였지만 그 사이를 지나쳤다.

강변을 따라 조금 걸었다.

사람이 적은 곳.
벤치 하나가 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앉았다..


도우루강이 천천히 흘렀다.
라벨루 배 한 척이 상류로 올라가고 있었다.
관광객들이 뱃전에서 손을 흔들었다.


강 건너편 언덕에 와인 셀러들이 보였다.
어제 걸었던 그 언덕.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것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모르겠다.
핸드폰을 보지 않으니 알 수 없었다.


갈매기가 날아왔다.
난간에 앉더니 강을 내려다봤다.

서로 무심한 채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현지인 할아버지가 옆 벤치에 앉았다.

신문을 펼쳤다.
읽는 둥 마는 둥.
가끔 고개를 들어 강을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신문으로 돌아갔다.


그의 하루도 이런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런데 완벽하게 채워진.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서울에서 주말은 또 다른 과제였다.
To-do 리스트, 밀린 빨래, 다음 주 준비.
"이번 주말 뭐 했어?"라는 월요일의 질문.
대답할 게 없으면 허송세월한 것 같았다.
쉬는 것도 죄책감이었다.
생산적이지 않으면 가치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할아버지를 보고 있으니 알 것 같았다.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할아버지가 천천히 일어났다.
걸어가는 것도 천천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급하지 않은 삶.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강물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언덕 위 와인 셀러들도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약간 저렸지만 상관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오르막이었지만 천천히 올랐다.
숨이 차도 멈추지 않았다.
급할 것도 없었다.


숙소 테라스에 올라갔다.
작은 의자 하나가 있었다.
앉아서 석양을 바라봤다.


오늘 하루 무엇을 했나.
세어보려 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났다.
오전 내내 침대에 누워 있었다.
오후에 강변 벤치에 앉아 있었다.
저녁에 석양을 보고 있다.


그게 전부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충만한 하루 같았다.


리스본에서는 걸었다.
길을 잃으며 도시를 탐험했다.
일출을 보고, 와인을 마셨다.
그 하루들도 좋았다.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가장 많이 느꼈다.
움직이지 않았는데 가장 멀리 왔다.

무언가를 해야만 살아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여기 있는 것.
숨 쉬고, 바라보고, 느끼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밤이 왔다.


강 건너편에 불이 켜졌다.
하나둘, 와인 셀러들의 간판이 빛났다.
동 루이스 다리도 조명을 받아 붉게 빛났다.


테라스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하려다가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하루가 끝나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하루.
하지만 가장 귀한 하루.


조용히 중얼거렸다.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다고.
월요일도 이렇게 살 수 있다고.
이 고요함이 진짜 선물이라고.


포르투의 밤은 깊어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깨어 있었다.


문뜩 눈에 가득 들어온 여행가방.

문옆에 고즈넉하게 놓여있는 그것이

무언가를 속사이는 듯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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