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실어 23화 -
여행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문 옆에 놓인 그것.
어제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는데,
오늘은 자꾸 시선이 갔다.
안에는 뭐가 들어 있을까.
며칠 입은 옷들.
리스본에서 산 와인 한 병.
빈 공간.
곧 채워야 한다.
이 방의 흔적들로.
내일 떠난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항공권을 확인했다.
인천행, 16시 30분 출발.
화면을 보다가 손가락이 멈췄다.
취소 버튼.
누르면 어떻게 될까.
잠시 상상했다.
그리고 화면을 껐다.
침대에 앉았다.
창밖을 바라봤다.
도우루강이 어둠 속에서 반짝였다.
동 루이스 다리의 불빛이 물에 비쳤다.
저 멀리 와인 셀러들의 간판이 희미하게 빛났다.
어제까지는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떠나야 한다는 현실.
돌아가면 뭐가 달라질까.
휴직 3개월이 끝난다.
같은 회사, 같은 책상으로 돌아간다.
동료들이 물을 것이다.
"여행 어땠어?"
뭐라고 대답하지.
"좋았어"?
"리프레시됐어"?
그런 말로 설명할 수 없는데.
창문을 열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얼굴에 닿았다.
온기가 식었다.
여기 남으면 어떨까.
갑자기 떠오른 생각.
말도 안 되는 생각.
하지만 계속 맴도는 생각.
상상했다.
항공권을 취소한다.
숙소를 한 달 더 예약한다.
작은 월세 방을 구한다.
아침마다 빵집에 간다.
카운터에 서서 에스프레소를 마신다.
15분,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포르투갈어를 배운다.
"Bom dia" 아침인사부터 천천히.
말이 서툴러도 사람들이 웃으며 기다려준다.
점심에는 타스카.
프라토 두 디아, 와인 한 잔.
2시간을 앉아 있어도 괜찮다.
오후에는 강변을 걷는다.
목적지 없이.
저녁에는 테라스에서 석양.
매일.
주말이 따로 없다.
월요일이 특별하지 않다.
모든 날이 그냥 하루다.
가능할 것 같았다.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침대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봤다.
여기 남는 게 정말 답일까.
포르투는 아름다웠다.
느렸고, 따뜻했고, 자유로웠다.
하지만 이건 여행이었다.
여행자로 사는 것과
정착해서 사는 것은 다르다.
언어는 여전히 서툴 것이다.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외로움이 있을 것이다.
가족도, 친구도, 익숙한 것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기 남는다고 해서
서울에서의 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잠이 오지 않았다.
눈을 감아도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휴직 신청서를 내던 날이 떠올랐다.
"도망치는 거 아니야?"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팀장이 물었었다.
"괜찮겠어?"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을지 몰랐으니까.
그리고 도망쳤다.
리스본으로, 포르투로.
하지만 깨달았다.
도망은 장소를 바꾸는 게 아니었다.
나를 바꾸는 것이었다.
포르투에 남는 것도 또 다른 도망일 뿐이다.
서울에서 도망쳐 리스본, 포르투로
포르투에서 또 어디로.
진짜 필요한 건 머무는 게 아니라
찾은 나를 지키는 것.
새벽 4시.
눈이 떠졌다.
일어나 옷을 입었다.
숙소를 나왔다.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만 희미하게 켜져 있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골목을 가로질렀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걸었다.
리베이라 쪽으로.
어제 갔던 빵집 앞을 지나쳤다.
문이 닫혀 있었다.
아직 빵 굽는 냄새도 나지 않았다.
타스카도 어둠 속에 조용했다.
내일이면 다시 열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없을 것이다.
강변에 도착했다.
어제 앉았던 벤치.
마지막으로 앉았다.
강이 어둠 속에서 흘렀다.
찰랑, 찰랑.
물소리만 들렸다.
하늘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이 남색으로 변했다.
그제야 알았다.
여기 남는 게 답이 아니었다.
여기는 내가 머물 곳이 아니라,
나를 찾은 곳이었다.
도망쳐 온 게 아니었다.
찾으러 온 것이었다.
서울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회사에서, 관계에서, 일상에서 사라졌던 나를.
포르투에서 찾았다.
혼자 밥 먹어도 괜찮은 나.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나.
느리게 살아도 괜찮은 나.
나를 찾았으니,
이제 돌아가도 괜찮다.
아니, 돌아가야 한다.
찾은 나를 지키러.
해가 떴다.
강물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새들이 날아올랐다.
도시가 깨어나고 있었다.
벤치에서 일어났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언덕을 올랐다.
마지막으로.
빵집이 문을 열고 있었다.
아주머니가 셔터를 올렸다.
갓 구운 빵 냄새가 흘러나왔다.
발걸음이 멈췄다.
들어가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지나쳤다.
짐을 싸야 했다.
숙소 방.
여행가방을 침대 위에 올렸다.
옷을 하나씩 넣었다.
며칠 입은 것들.
세탁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포르투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리스본에서 산 와인.
조심스럽게 옷 사이에 넣었다.
깨지지 않도록.
포르투 타스카 냅킨.
레스토랑 이름이 적혀 있었다.
가방 옆 주머니에 넣었다.
가이드북.
한 번도 펼쳐보지 않았다.
그대로 넣었다.
가방을 닫고 방을 둘러봤다.
며칠을 보낸 방.
창문 너머로 도우루강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
가방을 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묵직했다.
올 때보다 무거웠다.
물건이 늘어서가 아니었다.
무게가 다른 것들을 담았으니까.
택시 운전사가 트렁크를 열었다.
뒷좌석에 앉았다.
"Aeroporto." 공항.
창밖으로 포르투가 지나갔다.
도우루강.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동 루이스 다리.
붉은 철골이 선명했다.
리베이라 광장.
사람들이 걷고 있었다.
어제까지 나도 저렇게 걸었다.
작은 빵집이 보였다.
카운터에 사람들이 서 있었다.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타스카도 지나쳤다.
테라스 자리에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있었다.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섭섭하지 않았다.
마음속에 가져갈 수 있으니까.
공항에 도착했다.
가방을 끌고 입구로 향했다.
자동문이 열렸다.
한 걸음 들어서기 전에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포르투의 하늘이 파랗게 펼쳐져 있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포르투의 공기를.
마지막으로.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예전의 나로는 돌아가지 않는다.
새로운 나로 살아가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