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실어 24화 -
비행기가 이륙했다.
포르투 공항 활주로가 점점 작아졌다.
도우루강이 가늘어졌다.
주황색 지붕들이 점으로 변했다.
창밖으로 구름이 올라왔다.
하얀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다시 리스본에서 인천까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눈을 감았다.
리스본이 떠올랐다.
창밖 구름이 아줄레주 타일 같았다.
파란색과 흰색의 무늬.
알파마 골목 벽을 뒤덮던 그 패턴.
첫날 아침.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같은 성당을 두 번 지나쳤다.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로웠다.
손을 주먹 쥐었다 폈다.
돌바닥의 촉감이 손바닥에 남아있는 것 같았다.
삐걱거리던 계단.
차가운 아줄레주 타일.
테라스에서 마신 비뉴 베르데.
작은 기포가 혀끝에서 터졌다.
해가 질 때마다 강을 바라봤다.
테주강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갈매기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다.
새벽에 일어나 일출을 보러 갔던 날.
아무도 없는 전망대에서 혼자 해가 뜨는 걸 봤다.
눈물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포르투가 떠올랐다.
프란세지냐.
치즈가 녹아내리던 모습.
매콤한 소스의 향.
창밖으로 강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먹었다.
셀러의 오크통.
수십 년 묵은 나무의 결.
노인의 손에 배어있던 보랏빛 얼룩.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색.
그가 건넨 특별한 와인.
이름도 몰랐지만 특별했다.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통했다.
가슴에 손을 얹던 그 순간.
월요일 아침.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강가 벤치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처음에는 불안했다.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게 괜찮았다.
눈을 떴다.
여전히 구름 속이었다.
승무원이 기내식 카트를 밀고 지나갔다.
포르투갈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서울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천공항.
비행기 문이 열리는 순간,
익숙한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리스본의 따스함도, 포르투의 바람도 아닌.
서울의 공기.
입국장을 걸었다.
사람들이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를 안은 여자가 울고 있었다.
남자가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나를 기다리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외롭지 않았다.
짐을 찾았다.
가방 손잡이를 잡는 순간 무거웠다.
공항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불었다.
리무진 버스 창밖으로 서울이 지나갔다.
고층 빌딩, 아파트, 간판들.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조금 달라 보였다.
아니, 내가 달라진 건지도 몰랐다.
집.
현관문을 여는 순간,
2주 동안 비워뒀던 집의 냄새가 났다.
불을 켰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달력은 며칠 전에 멈춰 있었다.
싱크대에 머그컵 하나.
떠나던 날 아침 마신 커피잔.
먼지가 살짝 앉아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어깨가 가벼워졌다.
아니, 가방만 내려놓은 게 아니었다.
리스본의 햇살.
포르투의 강바람.
혼자여도 괜찮다는 확신.
그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하지만 텅 빈 느낌은 아니었다.
오히려 채워진 기분이었다.
무언가 단단한 것이 안에 남아있었다.
이름 붙일 수 없지만 확실한 것.
창문을 열었다.
서울의 밤공기가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피곤했다.
하지만 불편하지 않았다.
잠이 왔다.
알람 소리.
삐리리리리.
손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핸드폰을 찾았다.
화면을 더듬었다.
시간을 봤다.
오전 일곱 시.
월요일.
예전 같았으면 출근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휴직 중이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창문을 열었다.
아침 공기가 들어왔다.
서울의 공기.
숨이 막히지 않았다.
그냥 달랐다.
저 아래 거리에서 소음이 들렸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 발소리, 공사 소리.
예전에는 시끄럽게만 느껴졌는데.
지금은 그냥 소리였다.
커피를 내리는 동안
포르투 빵집이 떠올랐다.
"Bom dia"라고 인사하던 주인.
향이 퍼졌다.
쓰고 진한 냄새.
잔에 따라서 창가로 갔다.
서서 천천히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
예전에는 서서 마시며 핸드폰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창밖의 풍경과 함께 마셨다.
점심때쯤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 얼굴이 조금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살아있었다.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모두 바빴다.
예전의 나도 항상 저랬다.
하지만 지금은 뒤처지는 게 두렵지 않았다.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차를 마셨다.
주변을 둘러봤다.
대부분 혼자 앉아 있었다.
노트북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혼자 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한 시간쯤 있다가 나왔다.
오래간만에 국밥집.
구석 자리에 앉았다.
국밥의 하얀 김이 올라왔다.
한 숟가락 떴다.
뜨거웠다.
갑자기 스치듯 포르투의 프란세지냐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것 과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좋았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깊숙이 몸을 의지했다..
오늘 하루를 떠올렸다.
작은 일들.
특별할 것 없는 일상.
하지만 예전과는 달랐다.
예전에는 의무였다.
지금은 선택이었다.
나의 속도로 하는 것들이었다.
테이블 위에 와인 병이 보였다.
리스본에서 가져온 알렌테주 레드.
언젠가 열 날이 올 것이다.
다시 힘든 날.
다시 숨이 막히는 날.
그날 이 병을 열 것이다.
혼자, 서울 작은 방에서.
그리고 기억할 것이다.
리스본의 골목. 포르투의 강.
혼자여도 괜찮았던 그 시간들.
다시 도망칠 수도 있다.
더 작게, 더 자주.
아직 도망갈 시간이 있었다.
충분한 시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준비를 위한 도망.
하지만 예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어떨지 모른다.
다시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안다.
도망치는 건 나약함이 아니라는 것을.
혼자여도 괜찮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나는 이미 달라져 있다는 것을.
조용히 중얼거렸다.
포르투갈 여행은 끝났지만
도망은 끝나지 않았다.
여행도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자유는 시작됐다.
리스본 와인 병을 다시 봤다.
라벨에 코르크나무 그림이 있었다.
전등 불빛에 반짝였다.
언젠가 다시 도망칠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안다.
도망은 포기가 아니다.
도망은 선택이다.
나를 지키는 선택.
나는 이미 달라져 있다.
그리고 계속 달라질 것이다.
매일, 조금씩.
나답게.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평화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