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9화 -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저녁이었다.
테주강(Tejo) 강변에 앉아 있었다.
석양이 강물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부서졌다.
저 멀리 4월 25일 다리(Ponte 25 de Abril)가 보였다.
붉은 철골이 석양빛에 물들어 더욱 붉어 보였다.
갈매기들이 다리 위를 날았다.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내일이면 떠난다.
이 도시를, 이 강을, 이 공기를.
가슴 어딘가가 먹먹해졌다.
하지만 슬프지는 않았다.
이상하게, 충만한 기분이었다.
며칠 전, 이 도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를 떠올렸다.
공항을 나서던 순간의 공기.
따뜻하고, 낯설고, 자유로웠던.
택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던 파스텔톤 건물들.
노란 트램이 비탈길을 오르던 풍경.
그때는 몰랐다.
이 며칠이 이렇게 달라질 줄.
아니, 내가 이렇게 달라질 줄.
첫날밤, 숙소 창가에 서서 강을 바라봤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
그 익명성이 주는 해방감에 눈물이 났었다.
다음 날은 길을 잃었다.
알파마(Alfama) 골목을 헤매다가 같은 성당을 두 번 봤다.
낯선 할아버지가 숙소까지 데려다줬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웃음은 통했다.
새벽에는 혼자 일출을 봤다.
전망대에 앉아 해가 떠오르는 걸 바라봤다.
사진을 찍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봤다.
그리고 울었다.
왜 우는지도 모르면서.
어젯밤에는 와인바를 돌아다녔다.
치아두, 바이샤, 바이루 알투.
골목마다 다른 잔을 마셨다.
혼자 마시는 와인이 이렇게 달콤한 줄 몰랐다.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 여기로 흘러왔다.
테주강 강변, 마지막 석양 앞에.
내일이면 서울로 돌아간다.
그 생각을 하자 가슴이 조여왔다.
익숙한 조임이었다.
서울에서 매일 아침 느꼈던 그 감각.
출근길 지하철.
엘리베이터 안의 침묵.
회의실에서 삼키는 말들.
퇴근 후에도 울리는 알림들.
그 모든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멈춰 있을 뿐, 사라진 건 아니었다.
두려웠다.
솔직히 두려웠다.
여기서 느낀 이 자유가,
이 가벼움이,
이 숨 쉬는 감각이,
서울에 돌아가면 다시 사라질까 봐.
며칠 만에 찾은 나를,
다시 잃어버릴까 봐.
강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며칠이 그냥 휴가였을까.
잠깐의 도피였을까.
현실에서 벗어난 환상이었을까.
돌아가면 다시 똑같아질까.
아침마다 알람을 무시하고,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참고,
괜찮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대답하고.
그 생각에 숨이 막혔다.
하지만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숨을 쉬고 있다.
서울에서는 어땠을까.
숨을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공기가 폐까지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항상 가슴 어딘가가 막혀 있었다.
회의실에서 숨을 참았다.
말하고 싶은 말을 삼킬 때마다.
엘리베이터에서 숨을 죽였다.
존재를 지우려는 것처럼.
퇴근길 지하철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유일한 호흡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내가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있다는 걸.
숨을 쉬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했다는 걸.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알파마 골목을 오를 때 숨이 찼다.
거친 호흡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숨이 차도 괜찮았다.
전망대에서 깊이 들이마셨다.
테주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폐 깊숙이, 끝까지.
그 공기가 온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카페에서 커피 향을 맡으며 숨을 쉬었다.
와인바에서 포도향을 들이마시며 숨을 쉬었다.
골목을 걸으며 빵 굽는 냄새를 맡으며 숨을 쉬었다.
그 모든 순간, 나는 숨을 쉬고 있었다.
진짜로.
온전히.
그제야 알았다.
이건 도망이 아니었다.
도망은 무언가로부터 멀어지는 것.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나는 것.
책임을 버리고 떠나는 것.
하지만 나는 멀어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가까워졌다.
나 자신에게.
서울에서는 나를 잃어버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맞추느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느라.
괜찮은 척하느라.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진짜 나는 사라져 가고 있었다.
숨을 쉬지 못하는 것처럼.
서서히 질식해가고 있었다.
리스본은 그걸 멈추게 해 줬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도시에서,
아무런 역할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으로 나 자신을 만났다.
딸기 우유를 좋아하는 나.
혼자 걷는 걸 좋아하는 나.
계획 없이 헤매는 걸 즐기는 나.
일출을 보며 우는 나.
와인 한 잔에 행복해지는 나.
그 모든 내가 여기 있었다.
사라진 게 아니라, 숨어 있었을 뿐.
도망이 아니라 귀환이었다.
나에게로의 귀환.
석양이 완전히 저물었다.
하늘이 주황에서 보라로, 보라에서 남색으로 변해갔다.
강물 위로 도시의 불빛들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알파마 언덕 위로 첫 번째 별이 떴다.
일어서서 강변을 따라 걸었다.
알파마 쪽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그 골목을 걷고 싶었다.
좁은 계단을 올랐다.
숨이 찼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빨래가 걸린 골목을 지났다.
파두 음악이 어딘가에서 흘러나왔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에서 이쪽을 바라봤다.
전망대에 도착했다.
도시 전체가 발아래 펼쳐져 있었다.
주황색 지붕들의 바다.
그 너머로 테주강이 빛나고 있었다.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 공기를 기억하고 싶었다.
이 순간을 몸에 새기고 싶었다.
서울에 돌아가도 이 숨쉬기를 잊지 않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숨을 참을 때,
회의실에서 말을 삼킬 때,
괜찮냐는 질문에 괜찮다고 대답할 때.
그때마다 이 순간을 떠올릴 것이다.
테주강의 바람을.
알파마의 골목을.
진짜로 숨을 쉬던 이 감각을.
도망치고 싶다는 마음이 다시 찾아오면,
그때는 진짜로 도망치면 된다.
여기로, 혹은 다른 어딘가로.
숨을 쉴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나약함도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다.
나를 지키기 위한 용기다.
밤하늘에 별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별들.
너무 밝아서, 너무 바빠서 보지 못했던 별들.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내일이면 떠난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아니, 여전히 조금은 두려웠다.
하지만 괜찮았다.
두려워도 괜찮다는 걸 알았으니까.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배웠으니까.
리스본이 가르쳐준 것.
숨 쉬는 법.
멈추는 법.
나를 찾는 법.
이제 어디서든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서울에서도, 어디서든.
방법을 알았으니까.
골목을 내려오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진짜로 숨을 쉬고 있다고.
그리고 이 숨쉬기를, 절대 잊지 않겠다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발걸음이 가벼웠다.
문득 생각이 스쳤다.
휴직 기간은 아직 남아 있었다.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였을까.
포르투.
리스본에서 북쪽으로 세 시간.
아직 가보지 못한 도시.
계획에 없던 생각이었다.
원래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생각.
비행기표도 끊었고, 일정도 정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처음으로 계획을 바꾸고 싶었다.
처음으로 즉흥적인 결정을 하고 싶었다.
숙소에 돌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서울행 비행기 날짜를 일주일 뒤로 변경했다.
변경 수수료가 꽤 나왔지만 상관없었다.
포르투행 기차표를 검색했다.
내일 아침, 산타 아폴로니아(Santa Apolónia)역 출발.
손이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심장이 뛰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원래의 나에 대한 작은 도발이었다.
예약 버튼을 눌렀다.
내일은 포르투(Porto)로 간다.
또 다른 도시, 또 다른 숨쉬기.
내 도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