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8화 -
치아두(Chiado) 언덕을 내려오는 길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이 파스텔톤 건물 벽을 타고 흘러내렸다.
28번 트램이 삐걱거리며 비탈을 올라갔다.
종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그때 골목 끝에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에
시선이 머물렀다. 작은 와인바였다.
문이 열려 있었고,
안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바 안은 좁았다.
카운터 의자가 여섯 개.
테이블이 세 개.
벽에는 와인 병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라벨이 희미한 것들, 손때 묻은 것들.
오래된 서재 같은 분위기였다.
바텐더가 고개를 들었다.
중년 남자였다.
수염이 덥수룩했고, 눈가에 주름이 깊었다.
"보아 노이치(Boa noite)."
좋은 저녁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보아 노이치."
따라 말하며 카운터에 앉았다.
"비뉴(Vinho)?"
와인을 원하냐고 물었다.
가벼운 게 있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냉장고에서 병을 꺼냈다.
연두빛 라벨.
비뉴 베르데(Vinho Verde).
미뉴(Minho) 지방에서 온 거라고,
아주 상쾌하다고 했다.
그가 잔에 따랐다.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한 모금 마셨다.
시원하고, 상큼하고, 살짝 탄산이 느껴졌다.
마치 이 도시의 저녁 공기 같았다.
해가 막 지고, 밤이 시작되기 직전의.
그 경계의 맛.
창밖으로 트램이 또 지나갔다.
종소리가 울렸다.
와인잔 속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바텐더가 리스본은 처음이냐고 물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밤엔 꼭 걸어봐야 한다고 했다.
바이루 알투(Bairro Alto),
카이스 두 소드레(Cais do Sodré).
그가 지도를 그리듯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른 와인, 다른 소리, 다른 빛이 있을 거라고.
그 말이 마음에 남았다.
잔을 비우고 골목으로 나왔다.
바이샤(Baixa) 쪽으로 내려갔다.
좁은 길이 미로처럼 이어졌다.
한 블록을 걸을 때마다 다른 바가 나타났다.
어떤 곳은 문 앞에 칠판이 놓여 있었다.
도우루(Douro) 레드, 글라스 4유로.
알렌테주(Alentejo) 화이트, 카라페 12유로.
마치 골목 전체가 하나의 와인 리스트 같았다.
지도 대신 와인 이름을 따라 걷는 밤.
두 번째 바에 들어갔다.
이번엔 더 작았다.
카운터만 있었고, 의자도 네 개뿐이었다.
벽에 포트 와인 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루비, 토니, 화이트.
색깔이 전부 달랐다.
바텐더가 시음 세트를 원하냐고 물었다.
젊은 여자였다.
귀에 작은 귀걸이가 반짝였다.
고개를 끄덕였다.
세 개의 작은 잔이 나란히 놓였다.
왼쪽부터 화이트, 루비, 토니.
화이트는 황금빛이었다.
꿀과 살구 향.
해 질 녘의 빛 같았다.
루비는 짙은 붉은색.
체리와 초콜릿.
밤 열 시, 골목에 가로등이 켜질 때의 색.
토니는 호박색.
견과류와 캐러멜.
자정이 넘어 도시가 고요해질 때의 온기.
세 잔이 리스본의 밤을 시간순으로 담고 있었다.
해 질 녘에서 자정까지.
한 모금씩 마실 때마다 시간이 흘러갔다.
어떤 게 마음에 드냐고 물었다.
토니를 가리켰다.
그녀가 웃으며 잔을 다시 채워줬다.
좋은 선택이라고, 늦은 밤에 어울린다고 했다.
늦은 밤을 위한 선택.
아직 밤은 길었다.
바이루 알투로 올라갔다.
계단이 가팔랐다.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브 음악.
소리를 따라 골목을 돌았다.
작은 바가 있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 파두 음악이 흘러나왔다.
바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서서 마시는 사람, 벽에 기대 이야기하는 사람.
웃음소리, 잔 부딪치는 소리, 기타 소리.
모든 게 뒤섞여 있었다.
바 뒤 선반에 병들이 빽빽이 정렬돼 있었다.
메뉴판은 없었다.
그냥 가리키면 따라주는 식이었다.
레드 와인을 달라고 했다.
아무거나 가리켰다.
잔이 나왔다.
어떤 품종인지, 어느 산지인지 몰랐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부드럽고, 약간 스파이시했다.
그 순간 가수가 고음을 질렀다.
파두 특유의 애절한 목소리.
사우다지(Saudade).
그리움, 상실, 갈망.
포르투갈 사람들만 느낀다는 그 감정.
와인과 음악이 묘하게 어울렸다.
슬프면서도 달콤했다.
무겁면서도 가벼웠다.
이게 정확히 어떤 품종인지,
몇 년산인지,
어떤 음식과 어울리는지.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 잔과 지금의 음악,
이 공기와 이 순간.
그것만이 진짜였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잔을 들어 보였다.
건배하자는 뜻 같았다.
잔을 부딪쳤다.
그가 뭐라고 말했는데 음악 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바를 나왔을 때, 머리가 약간 빙글 돌았다.
골목을 걸었다.
카이스 두 소드레 쪽으로 내려갔다.
강 냄새가 희미하게 났다.
테주강(Tejo)이 가까웠다.
마지막으로 한 곳에 더 들렀다.
와인숍 겸 바.
병을 사서 잔으로도 마실 수 있는 곳.
선반에 병들이 줄지어 있었다.
라벨을 하나씩 읽었다.
도우루, 알렌테주, 다웅(Dão).
지명들이 와인 이름이 되어 있었다.
한 병을 골랐다.
알렌테주 레드.
라벨에 코르크 나무 그림이 있었다.
손짓과 함께 집에 가져간다고 말했다.
점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포장해줬다.
좋은 기억이 될 거라고 했다.
기념품을 고르듯 추억이 될 병을 골랐다.
서울로 돌아가서 이 병을 열면,
오늘 밤이 다시 떠오를 것이다.
치아두의 첫 잔.
바이샤의 포트 플라이트.
바이루 알투의 파두와 레드 와인.
도시를 잔 단위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테주강이 보이는 언덕에서 멈춰 섰다.
강 위로 달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저 멀리 4월 25일 다리의 불빛이 반짝였다.
오늘 밤, 몇 잔을 마셨을까.
비뉴 베르데, 화이트 포트, 루비, 토니, 레드.
골목마다 다른 잔이었고,
잔마다 다른 리스본이었다.
서울에서는 술을 마시면 취했다.
기분이 좋아지거나, 슬퍼지거나, 피곤해지거나.
술은 감정을 증폭시키는 도구였다.
하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취한 게 아니라 스며든 느낌이었다.
리스본이 몸 안으로 들어온 느낌.
골목의 돌바닥, 트램의 종소리, 파두의 선율.
그 모든 것이 와인과 함께 흡수된 느낌.
혼자 마시는 와인이 이렇게 달콤할 줄 몰랐다.
아니, 혼자여서 더 달콤했는지도 몰랐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다른곳에 신경 쓰느라
음악을 놓쳤을 것이다.
상대방 취향에 맞추느라
마시고 싶은 걸 못 마셨을 것이다.
사진 찍느라 잔 속 기포가
사라지는 걸 못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혼자였기에.
온전히 이 밤을 마실 수 있었다.
품에 안은 와인 병이 묵직했다.
서울로 가져갈 리스본.
병을 열 때마다 오늘 밤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숙소 문을 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밤, 리스본을 통째로 마셨다고.
그리고 그 맛은, 자유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