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7화 -
새벽 다섯 시에 눈이 떠졌다.
알람을 맞추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깼다.
서울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서는 알람을 세 번씩 맞춰놓고도
이불 속에서 버티기 일쑤였으니까.
창문 너머로 아직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잠이 덜 깬 눈으로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이 스쳤다.
일출을 보러 가볼까.
이상한 생각이었다.
서울에서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일.
아니, 해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는 일.
하지만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세수도 대충 하고, 어제 입던 옷을 그대로 걸쳤다.
숙소 문을 열고 나서는 데 5분도 걸리지 않았다.
새벽의 알파마 골목은 완전히 달랐다.
낮에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던 좁은 길이
지금은 텅 비어 있었다.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돌바닥을 비추고 있었다.
발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자신의 발소리만.
다른 소리는 없었다.
고양이 한 마리가 담벼락 위에서 이쪽을 바라봤다.
눈이 마주쳤지만 도망가지 않았다.
노란 눈동자가 가로등 빛에 반짝였다.
이 시간의 주인은 고양이인 것 같았다.
언덕을 올랐다.
어디로 가야 일출을 잘 볼 수 있는지 몰랐다.
그냥 높은 곳으로 가면 되겠지 싶었다.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것도 이상하게 두렵지 않았다.
어제 하루 종일 길을 잃으며 걸었던 경험이
오히려 용기가 되었다.
한참을 올라서 작은 광장에 도착했다.
전망대 같은 곳이었다.
난간 너머로 테주강이 어둠 속에 누워 있었다.
벤치에 앉았다.
숨을 고르며 하늘을 바라봤다.
아직 해는 뜨지 않았다.
하지만 수평선 쪽이 조금씩 밝아지고 있었다.
검은색이 남색으로, 남색이 보라색으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변해가고 있었다.
서울에서 일출을 본 게 언제였을까.
기억을 더듬어봤다.
정월 초하루에 해돋이를 보러 간 적이 있었다.
회사 동료들과 함께.
동해안까지 차를 몰고 가서
수천 명의 인파 속에서 해를 기다렸다.
그때 느낀 건 감동이 아니라 피로였다.
전날 밤 야근을 하고 그대로 출발했고,
차 안에서 쪽잠을 자고,
추위에 떨면서 해가 뜨길 기다렸다.
해가 떴을 때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녀도 따라서 환호했다.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었다.
SNS에 올릴 사진.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올리면서 해시태그를 달았다.
#해돋이 #새해첫날 #버킷리스트
좋아요가 몇 개나 달렸는지 확인했다.
하지만 정작 해를 제대로 본 기억은 없었다.
화면 속 해만 봤을 뿐.
눈으로 본 건 핸드폰 액정이었다.
그 후로 일출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볼 여유가 없었다.
새벽은 잠을 자는 시간이었고,
아침은 출근 준비를 하는 시간이었다.
해가 언제 뜨는지 관심조차 없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창밖을 본 적도 없었다.
지하로만 다녔으니까.
지상 구간을 지날 때도 핸드폰만 봤으니까.
하늘이 무슨 색인지,
구름이 어떤 모양인지,
해가 어디쯤 떠 있는지.
아무것도 고개를 들어 볼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리스본의 새벽에는
아무도 없는 전망대에 앉아
혼자 해가 뜨길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치 같기도 하고, 꿈 같기도 했다.
서울의 친구가 본다면 뭐라고 할까.
"미쳤어? 잠이나 더 자지."
아마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잠보다 이 순간이 더 소중했다.
효율보다 경험이 더 중요했다.
하늘이 점점 밝아졌다.
보라색이 분홍색으로 변하고,
분홍색이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구름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수평선 위로 붉은 점이 나타났다.
작은 점이 조금씩 커지면서
세상을 물들이기 시작했다.
숨을 멈추고 바라봤다.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핸드폰도 만지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봤다.
테주강이 주황빛으로 일렁였다.
강 위를 지나는 배 한 척의 실루엣이 보였다.
갈매기들이 날아올랐다.
흰 날개가 붉은 빛에 물들었다.
도시 전체가 천천히 깨어나고 있었다.
눈물이 났다.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슬픈 것도 아니고, 기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아름다워서일까.
혼자여서일까.
아니면 그동안 이런 순간을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해서일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냥 두었다.
닦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았으니까.
서울에서는 울 수 없었다.
회사 화장실에서 몰래 눈물을 훔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금방 닦아내고 거울을 봤다.
눈이 붓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화장이 번지지 않았는지 살피고.
우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우는 모습을 들키면 안 됐다.
약해 보이면 안 됐다.
괜찮지 않으면 안 됐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마음껏 눈물을 흘려도 됐다.
아무도 없으니까.
아무도 묻지 않으니까.
한참을 앉아 있었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고,
하늘이 맑은 파란색으로 변했다.
새벽의 고요함이 아침의 활기로 바뀌어갔다.
저 아래 골목에서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커피 향이 어디선가 올라왔다.
가게 셔터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일상이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서울의 일상과는 달랐다.
급하지 않았다.
쫓기는 느낌이 없었다.
서울의 아침을 떠올렸다.
알람 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샤워실로 뛰어가고,
화장을 하면서 뉴스를 틀고,
현관문을 나서면서 코트를 입고,
지하철역까지 뛰어가던 아침들.
아침밥은 편의점 삼각김밥.
지하철에서 서서 먹거나,
아예 굶고 출근하거나.
해가 뜨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아침 하늘이 무슨 색인지도 몰랐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창밖을 본 적도 없었다.
핸드폰만 들여다봤으니까.
매일 아침이 있었지만,
진짜 아침을 산 적은 없었다.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처음으로 아침을 사는 기분이었다.
혼자 보는 일출이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
아니, 혼자여서 더 아름다웠는지도 몰랐다.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어땠을까.
대화를 해야 했을 것이다.
"예쁘다", "사진 찍어줄까", "춥지 않아?"
그런 말들을 주고받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반응을 살폈을 것이다.
충분히 감동하고 있는지,
지루해하지는 않는지,
같이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지.
하지만 혼자였기에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변화, 공기의 온도, 새소리, 바람.
모든 감각이 열려 있었다.
혼자라는 것.
그것이 외로움이 아니라
온전함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전망대를 내려오면서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작은 빵집에 들렀다.
갓 구운 빵 냄새가 골목에 퍼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따뜻한 공기가 감쌌다.
"Bom dia."
점원이 인사했다.
좋은 아침이라는 뜻인 것 같았다.
"Bom dia."
따라 말했다.
발음이 어색했지만 점원이 웃었다.
나타(Nata) 두 개와 커피를 샀다.
파스텔 드 나타.
포르투갈의 에그타르트.
테이크아웃 컵을 들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침 햇살이 따뜻했다.
골목 사이로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이
건물 벽을 황금색으로 물들였다.
나타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바삭한 페이스트리가 부서지며
달콤한 크림이 입안에 퍼졌다.
계피 향이 코끝을 스쳤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하고 뜨거웠다.
나타의 달콤함과 커피의 쓴맛이 어우러졌다.
이 단순한 것들이 이렇게 좋을 줄이야.
오늘 하루가 어떻게 될지 몰랐다.
계획도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일출을 봤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이미 충분했다.
숙소 근처 골목에서 멈춰 섰다.
저녁에는 뭘 할까 생각했다.
어제 지나쳤던 작은 식당이 떠올랐다.
창문 너머로 와인 잔이 보였던 곳.
현지인들이 앉아서 천천히 식사하던 곳.
저녁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혼자 보는 일출이 이렇게 좋았으니,
혼자 마시는 와인도 좋을 것 같았다.
조용히 중얼거렸다.
오늘 하루는 이미 완벽하다고.
그리고 아직 아침인데 벌써 저녁이 기대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