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이 걷는 거리의 마법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6화 -

by 마르코 루시

손가락이 구글맵 화면 위에서 멈춰 있었다.

누르면 편하다. 한동안 멈춘 듯 쳐다봤다.
파란 점이 움직이며, 화살표가 길을 알려준다.
익숙한 방식. 안전한 방식.

오늘은 아니다.

핸드폰을 침대에 던졌다.


주머니에는 여권, 현금 50유로,

숙소 명함 한 장. 그게 전부였다.

알파마(Alfama) 골목으로 들어섰다.
왼쪽에서 빵 굽는 냄새가 났다.
빵 굽는 고소한 내음을 따라 걸었다.

5분 만에 완전히 길을 잃었다.

농담이 아니었다.


알파마는 진짜 미로였다.

골목이 갈라지고, 계단이 나타나고,
막다른 길이 툭툭 튀어나왔다.
어디가 위쪽이고 아래쪽인지도 헷갈렸다.


칼사(Calça)다.
검은색과 흰색 돌로 만든 포르투갈 바닥.
예쁘긴 한데, 미끄러웠다.
한 번 발을 헛디뎌서 난간을 잡았다.
무릎이 까질 뻔했다.


오르막이 끝이 없었다.
리스본이 '일곱 개의 언덕 도시'라더니 진짜였다.
허벅지가 땅기고, 숨이 찼다.
서울에서 엘리베이터만 타던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잠깐. 물을 안 샀다.

벌써 목이 말랐다. 가게를 찾아야 했다.

가게를 찾는 것도 일이었다.

골목에는 낡은 집들만 있었다.
창문에서 빨래가 펄럭이고,
할머니들이 뭐라고 소리치고,
고양이가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다.

편의점 같은 건 없었다.


간판도 전부 포르투갈어.
MERCEARIA(메르세아리아)라고 적힌

작은 가게를 발견했다.

식료품점인 것 같았다.

문을 밀었는데 안 열렸다.
당겼더니 열렸다.
포르투갈은 문을 당기는 건가.


안에 할아버지가 계셨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라디오에서 파두 음악이 흘러나왔다.

"Água(아구아)?" 물.
그 단어 하나는 외워왔다.

할아버지가 냉장고를 가리켰다.
물병을 꺼내서 계산대에 올렸다.
"Um euro" 1유로.
숫자는 알아들었다.


가게를 나와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반 병을 단숨에 비웠다.
차갑고 시원했다.
살 것 같았다.

그늘진 계단에 앉아서 잠시 쉬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4월인데 햇살이 따가웠다.
서울의 4월과는 전혀 달랐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어떤 성당 앞을 지나갔다.
하얀 돔이 인상적이었다.

사진을 찍으려다가 멈췄다.
핸드폰이 없었다.

그냥 눈으로 봤다. 오래 봤다.


다시 걸었다.
골목을 돌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막을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까 그 성당이 또 나왔다.
같은 하얀 돔. 같은 광장.

한 바퀴를 돈 것이다.
한 시간 동안 걸어서 제자리.

"뭐야..."

혼잣말이 나왔다.

서울에서였다면 짜증이 났을 것이다.
시간 낭비라고, 비효율적이라고.

그런데 웃음이 났다.
진짜로 길을 잃었다는 증거였으니까.
제대로 잃어버렸다는 증거.


이번엔 아까 안 갔던 방향으로 꺾었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전망대였다.
테주강이 한눈에 보였다.
주황색 지붕들이 강까지 쏟아져 내려가고 있었다.
저 멀리 혁명 다리, 4월 25일 다리가 보였다.
금문교를 닮은 붉은 다리.


바람이 불었다.
강에서 올라오는 바람.
짭짤하고 시원했다.
땀이 식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벤치에 노인들이 앉아 있었다.
신문을 읽거나, 대화를 나누거나,

그냥 강을 바라보거나.
나를 힐끗 보고는 다시 자기 일을 했다.
그들에게 이건 일상이었다.


나에게는 기적 같은데,
누군가에게는 그냥 동네 풍경이라는 것.
묘하게 위로가 됐다.

한참을 서서 바라봤다.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 눈에 담았다.
더 오래, 더 깊이.


배가 고파졌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것 같았다.
해가 꽤 높이 떠 있었다.
2시? 3시?
시간을 모르니 배꼽시계에 의존해야 했다.

식당을 찾았다.
관광객용 말고, 동네 식당.

좁은 골목에 작은 간판.


TASCA 타스카.
포르투갈 선술집이라고 어디서 읽었다.

문을 열었다. 안에 손님이 두 명.
동네 할아버지들이 와인을 마시고 있었다.
TV에서 축구 경기가 나오고 있었다.


주인아주머니가 다가왔다.
뭐라고 말했는데 하나도 못 알아들었다.

"Menu?"
손으로 책 모양을 만들었다.

아주머니가 고개를 저었다.

벽에 뭔가 적혀 있었는데 전부 포르투갈어.
당황했다.

아주머니가 부엌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Bacalhau?" 바깔라우. 염장 대구다.

그건 알았다.

"Yes, bacalhau."


음식이 나왔다.

바깔라우 아 브라스(Bacalhau à Brás)
대구살에 감자채, 양파, 계란이 섞여 있었다.
위에 올리브가 얹혀 있었다.


한 입 먹었다.
짜다.
너무 짜서 놀랐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따라준 와인을 마시니 괜찮아졌다.

시큼하고 가벼운 하우스 와인.
짠 생선과 신 와인이 이상하게 어울렸다.


다 먹고 나니 아주머니가 작은 잔을 내밀었다.

진한 노란색 액체.
"Ginja"? 진자다. 체리 리큐어.

달콤하고 독했다.
입안에 체리향이 퍼졌다..

서울 점심값도 안 되는 가격에
생선 요리, 와인, 식후주까지.

"오브리가다(Obrigada), 감사합니다"

아주머니가 활짝 웃었다.


다시 걸었다.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건물들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바이샤(Baixa) 지구 근처까지 온 것 같았다.
건물이 정돈되고, 관광객이 많아졌다.


28번 트램이 지나갔다.
노란 트램이 삐걱거리며 언덕을 올랐다.
사람들이 매달려 있었다.

코메르시우 광장에 도착했다.
테주강이 바로 앞이었다.
강가에 앉아 신발을 벗었다.


핸드폰 없이 온종일을 보냈다.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해가 졌다.

이제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숙소가 어디지?


진짜 문제였다. 알파마 어딘가.
하지만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는데.

가로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골목이 어두워졌다.
낮에는 예뻐 보이던 골목이
밤에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핸드폰이 없다는 게 처음으로 불안했다.
지도도 없고, 번역기도 없고.
긴급 전화를 걸 수도 없었다.


잠깐.
숙소 명함. 주머니를 뒤졌다.

아침에 챙겨 온 명함.
포르투갈어였지만, 이걸 보여주면 되겠다.

근처 가게에 들어갔다.
명함을 보여줬다.

"Alfama? This hotel?"

젊은 여자가 명함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밖으로 나와서 방향을 가리켰다.
언덕 위쪽. 직진, 왼쪽, 올라가기.

"Obrigada."
"De nada."


30분을 걸었는데 또 모르는 곳이었다.

아까 알려준 대로 간 것 같은데.
분명 직진하고 왼쪽으로 꺾었는데.

다시 길을 물었다.
이번엔 동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명함을 보더니 직접 앞장섰다.
따라오라는 손짓.
5분 정도 함께 걸었다.
말은 안 통했지만, 가끔 서로 보며 웃었다.

숙소 골목 입구에서 할아버지가 멈췄다.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켰다.

할아버지가 손을 흔들며 돌아갔다.

숙소에 도착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발바닥이 욱신거렸다.
내일 종아리가 아프겠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창문을 열어두니 밤바람이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파두(Fado) 음악이 희미하게 들렸다.

천장을 바라보며 오늘을 떠올렸다.

같은 성당을 두 번 봤다.
세 번 길을 물었다.
모르는 할아버지가 숙소까지 데려다줬다.


말 안 통하는 식당에서 최고의 점심을 먹었다.

전부 계획에 없던 일들.
전부 길을 잃어서 생긴 일들.

통제를 내려놓으니 세상이 도와줬다.
계획을 버리니 우연이 찾아왔다.


길을 잃으니 사람을 만났다.

계획은 우연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이야말로 진짜 선물이었다.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인생도 그런 거 아닐까.
계획대로 안 될 때,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그게 오히려 새로운 길을 찾는 순간일지도.


리스본에서 길을 잃는 법을 배웠다.
이제 인생에서도 가끔 잃어봐야겠다.

길을 잃는 것이 이렇게 따뜻할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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