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5화 -
비행기에서 내린 순간, 공기가 달랐다.
16시간 만에 처음 마시는 바깥공기.
인천공항의 차가운 공기도 아니고,
서울의 무거운 공기도 아니었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낯선 공기.
리스본.
정말 왔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도시에,
정말로 도착했다.
입국 심사대를 지나는 동안 심장이 뛰었다.
혹시 뭔가 잘못될까, 돌려보내지는 않을까.
하지만 직원은 여권을 보더니 도장을 찍고 건넸다.
"Bem-vindo."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환영한다는 뜻 같았다.
짐을 찾아 나오는 순간,
공항 밖 햇살이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왔다.
서울을 떠날 때는 봄이었는데,
여기는 벌써 여름 같았다.
공항을 빠져나오는 순간,
햇살이 눈을 찔렀다.
4월의 리스본은 벌써 여름처럼 따뜻했다.
가방을 끌고 택시 승강장으로 향했다.
주변에서 포르투갈어가 들렸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게 좋았다.
택시 안에서 창밖을 바라봤다.
파스텔톤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노란색, 분홍색, 하늘색, 주황색.
서울에서는 본 적 없는 색깔들.
비탈길을 오르는 노란 트램이 지나갔다.
사진으로만 보던 그 트램.
실제로 보니 더 작고, 더 낡고, 더 아름다웠다.
택시 기사가 포르투갈어로 뭐라고 말했다.
알아듣지 못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웃었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괜찮았다.
소통하지 못해도 괜찮은 순간.
그것이 익명성이었다.
택시가 숙소 앞에 섰다.
작은 게스트하우스였다.
3일 전에 급하게 예약한 곳.
리뷰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곳이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좁은 계단, 삐걱거리는 나무 바닥,
창문 너머로 보이는 테주강.
완벽하지 않아서 그래서 완벽했다.
짐을 풀지 않고 바로 나왔다.
방에 있고 싶지 않았다.
이 도시를 걷고 싶었다.
지금 당장.
골목으로 들어섰다.
좁은 길, 낡은 건물, 걸려 있는 빨래.
돌바닥에 구두 소리가 울렸다.
벽에 아줄레주 타일이 붙어 있었다.
파란색과 흰색의 기하학적 무늬.
몇백 년 된 것처럼 보였다.
손으로 만졌다.
거칠고, 차갑고, 역사가 느껴졌다.
저 멀리서 파두(Fado) 음악이 흘러나왔다.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선율.
돌아올 수 없는 과거
혹은 떠나간 사람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이 묻어났다.
슬프지만 그 슬픔 속에 머무르고 싶은 미묘한 감정.
멜랑콜리했다.
굳이 어디서 들려오는지 찾으려 하지 않았다.
그냥 귀로 듣기만 했다.
12현의 포르투갈 기타가
영롱하고 애수 어린 독특한 음색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 아이, 커플, 관광객.
그 누구도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당연했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몰랐다.
서울에서는 항상 누군가 알아볼까 봐 조심했다.
동료와 마주칠까 봐,
아는 사람을 만날까 봐,
"어? 너 휴직 중이잖아, 왜 여기 있어?"라는
질문을 들을까 봐.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거리에서도,
늘 주변을 살폈다.
아는 얼굴이 있는지, 없는지.
그게 습관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일이 없었다.
완벽한 익명성.
완전한 자유.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몰랐다.
어느 회사를 다녔는지,
무슨 일을 했는지,
왜 여기 왔는지.
그저 한 명의 여행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카페에 들어갔다.
작은 테이블에 앉았다.
메뉴판을 펼쳤지만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점원이 다가와 당연한 듯 물었다.
"Um café? Espresso?"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Yes, Espresso."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길게 설명할 필요도,
완벽하게 주문할 필요도 없었다.
커피가 나왔다.
작은 잔에 담긴 진한 에스프레소.
한 모금 마셨다.
쓰고, 진하고, 뜨거웠다.
서울에서 마시던 커피와 달랐다.
아니, 마시는 나 자신이 달랐다.
서울에서는 커피도 효율이었다.
빨리 마시고, 빨리 일하고, 빨리 다음 일로.
카페인을 섭취하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천천히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
맛을 느끼며, 온기를 느끼며.
카페 밖으로 나왔다.
해가 기울고 있었다.
골목 사이로 석양빛이 비스듬히 들어왔다.
건물들이 주황빛으로 물들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지도를 보지 않았다.
목적지도 없었다.
그냥 걸었다.
오르막길을 올랐다.
숨이 찼지만 멈추지 않았다.
정상에 올랐을 때, 도시 전체가 보였다.
주황색 지붕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그 너머로 테주강이 빛나고 있었다.
4월 25일 다리가 저 멀리 보였다.
갈매기들이 하늘을 날았다.
그들의 울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다.
저 멀리 배 한 척이 강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이 순간을 느끼고 싶었다.
이 공기를, 이 빛을, 이 고요함을.
서울에 일할 때는 항상 다음을 생각했다.
다음 회의, 다음 일정, 다음 마감.
지금 이 순간에 있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달랐다.
지금 이 순간만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느리고, 부드럽고, 관대하게.
벤치에 앉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앉아서 바라봤다.
저녁이 되었다.
배가 고팠지만 식당을 찾지 않았다.
골목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도 읽지 못했고, 추천도 받지 못했다.
그냥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나온 음식이 뭔지 정확히 몰랐다.
생선 요리 같았고, 감자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맛있었다. 깔끔한 맛.
서울에서는 맛집 리스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리뷰를 읽고, 별점을 확인하고,
인스타에서 사진을 찾아보고.
완벽한 식당을 찾으려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 가장 좋은 곳이었다.
계획하지 않은 것이 가장 완벽했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어두워진 거리에 가로등이 켜졌다.
따뜻한 빛이 돌바닥을 비췄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숙소가 어디쯤 인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하지만 불안하지 않았다.
길을 잃어도 괜찮았다.
어차피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돌아가야 할 곳도, 해야 할 일도 없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골목을 지나고, 계단을 오르고, 다리를 건넜다.
한참을 걸어서 우연히 숙소 근처로 돌아왔다.
운이 좋았다기보다는,
이 도시가 나를 받아준 것 같았다.
숙소로 돌아와 창가에 섰다.
강이 보였다.
달빛이 수면에 반짝였다.
바람이 커튼을 흔들었다.
핸드폰을 보니
카톡 알림이 몇 개 떠 있었다.
읽지 않았다.
지금은 어느 답장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서울의 시간과 여기의 시간은 달랐다.
그들은 아직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을 살고 있었다.
거울을 봤다.
낯선 얼굴이었다.
아니, 낯익은 얼굴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얼굴.
지치지 않은 얼굴.
긴장하지 않은 얼굴.
살아있는 얼굴.
이 도시에서 나는 달랐다.
아무도 나를 모르니까,
나는 누구든 될 수 있었다.
아니, 진짜 나 자신이 될 수 있었다.
직장인도 아니고,
누군가의 동료도 아니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름표도, 직함도, 역할도 없었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니,
비로소 보였다.
내가 정말 누구인지.
그저 나.
온전한 나.
침대에 누웠다.
창문을 열어뒀다.
바람이 들어왔다.
어딘가에서 파두 음악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내일은 어디를 갈까.
계획은 없었다.
그게 좋았다.
지도를 보지 않기로 했다.
길을 잃는 게 목표였다.
이 도시의 골목 어딘가에서,
우연을 만나고 싶었다.
익명의 도시에서,
익명의 나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진짜 자유였다.
눈을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내일은, 정말로 길을 잃어봐야겠다고.
그런데 몰랐다.
길을 잃는 것이 그렇게 아름다울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