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를 끊던 날의 설렘

-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4화 -

by 마르코 루시

검색창에 'Lisbon‘이라고 입력했다.


손가락이 떨렸다.

엔터키를 누르기 직전,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포르투갈.

리스본.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라.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언어.


정말 미친 짓 아닐까.


하지만 마우스는 이미 검색 결과 위를 움직이고 있었다.

인천발 리스본행.

경유 1회, 16시간 30분.

가격을 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

노트북 화면과 통장 잔고를 번갈아 봤다.

3개월 휴직 동안 쓸 돈까지 계산하면,

이 항공권은 사치였다.

아니, 사치를 넘어서 무모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안 되는 일이었다.

국내 여행도 충분하다.

제주도도 좋고, 강릉도 좋고.

왜 굳이 포르투갈까지.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항공권, 숙박비, 식비, 교통비...

예전의 나라면 엑셀을 켜서

항목별로 예산을 짰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계산기를 멈추고 싶었다.

모든 게 합리적이어야 한다면,

모든 게 계획대로여야 한다면,

나는 평생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비합리적인 선택이 필요했다.

때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떠나야 했다.

때로는 무모함이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왜 하필 리스본일까.

정확한 이유는 몰랐다.

그냥 우연히 본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노란 트램이 비탈길을 오르고,

파스텔톤 건물들이 햇살을 받아 빛나고,

멀리 테주강이 푸르게 펼쳐진 사진.


그 사진을 보는 순간 알았다.

저기에 가야 한다고.

저 공기를 마셔야 한다고.

저 길을 걸어야 한다고.


설명할 수 없는 끌림.

논리적이지 않은 확신.

하지만 그 확신이 지금까지의 어떤 계획보다

강렬하게 다가왔다.


친구가 말했었다.

"리스본? 거기 뭐 있는데?"

"그냥 파리나 런던 가지, 왜 거기?"


맞는 말이었다.

리스본은 유럽에서도 끝자락이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것도 아니었고,

쇼핑하기 좋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모두가 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은 곳.

누가 추천해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이끄는 곳.


회사 다닐 때는 여행도 효율이었다.

유명 관광지, 인스타 핫플레이스,

가성비 좋은 맛집.

모든 게 데이터였고, 모든 게 리뷰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도 나에게 리스본을 추천하지 않았다.

가성비도 좋지 않고,

언어도 통하지 않고,

혼자 가기엔 먼 곳이었다.


그래서 더 가고 싶었다.

모든 합리성을 거부하고 싶었다.

효율이 아닌 선택을 하고 싶었다.


출발일을 선택하는 화면이 떴다.

달력을 스크롤하며 날짜들을 봤다.

2주 후? 한 달 후?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두는 게 맞을까.


손가락이 멈춘 곳은 '3일 후'였다.


이성적으로는 말도 안 됐다.

3일 안에 무슨 준비를 한다고.

비자는? 숙소는? 여행자 보험은?


하지만 심장은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다고.

시간을 주면 결국 포기하게 될 거라고.

망설일수록 두려움이 커질 거라고.


도망은 계획하는 게 아니라

실행하는 것이었다.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면,

영원히 떠나지 못할 것 같았다.


클릭했다.

3일 후, 인천공항 출발.


결제 화면으로 넘어갔다.

총금액이 화면에 떴다.

카드 번호 입력 칸이 깜빡였다.


마지막 순간이었다.

지금 취소하면 아무 일도 없다.

지금 창을 닫으면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다.

안전하고, 계획적이고, 합리적인 삶으로.


하지만 그 삶이 나를 여기까지 몰고 왔다.

완벽한 계획, 철저한 준비, 합리적인 선택.

그 모든 것이 나를 질식시켰다.


이제는 숨 쉬고 싶었다.

설령 그것이 무모해 보여도.

설령 그것이 비합리적이어도.


카드 번호를 입력했다.

손이 떨렸지만 숫자는 정확했다.

유효기간, CVC 번호, 비밀번호.


결제 버튼 위로 마우스가 움직였다.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포르투갈? 혼자? 지금?"

"너 포르투갈어 할 줄 알아?"

"그 돈이면 다른 거 할 수 있잖아."

"무슨 일 있어? 왜 그러는 거야?"


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이 이해할 필요가 없는 일이었다.

나조차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냥 가야만 했다.

그냥 떠나야만 했다.


클릭.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화면이 바뀌었다.

예약 번호가 생성되었다.

e-티켓이 메일로 발송되었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떨리던 손이 천천히 진정됐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것 같았다.


울컥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났다.

기쁨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었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예매 확인 메일을 열었다.

'인천(ICN) 리스본(LIS)'

그 글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뛰었다.


3일 후면 리스본에 있을 것이다.

3일 후면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을 것이다.

3일 후면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있을 것이다.


완전한 도망.

완전한 자유.

완전한 시작.


노트북을 덮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익숙한 거리, 익숙한 건물들이 보였다.


3일 후면 이 풍경이 아닌

완전히 다른 풍경을 보고 있을 것이다.

테주강의 석양,

알파마 거리의 노란 트램,

바이샤 지구의 돌바닥 광장.


상상만으로도 설렜다.

동시에 무서웠다.


하지만 괜찮았다.

두려움은 살아있다는 증거였다.

설렘은 새로운 시작의 신호였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누구에게 말해야 할까.

부모님? 친구들?

"3일 후에 포르투갈 간다"라고?


상상이 됐다.

놀란 목소리, 걱정하는 말투,

"왜 갑자기?", "혼자?", "위험하지 않아?"


설명하기 싫었다.

이해시키려 애쓰고 싶지 않았다.

이건 설명할 수 있는 종류의 선택이 아니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나중에 말하면 됐다.

아니, 말하지 않아도 됐다.

공항에서 문자 한 통이면 충분했다.


"잠깐 여행 다녀올게."


그 정도로.

더 이상은 설명하지 않기로.


짐을 싸야 했다.

가방을 꺼내서 바닥에 펼쳤다.

무엇을 가져가야 할까.


예전 같으면 리스트를 만들었을 것이다.

날씨 확인하고, 복장 계획하고,

필수품 체크리스트 작성하고.


하지만 그냥 눈에 띄는 옷 몇 벌을 집어넣었다.

검은색 티셔츠 두 장, 청바지 한 벌,

편한 운동화, 얇은 카디건.

리스본의 4월 날씨가 어떤지도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춥면 겹쳐 입고, 더우면 벗으면 됐다.


여권을 찾았다.

먼지가 쌓여 있었다.

마지막으로 쓴 게 언제였을까.

2년 전? 3년 전?

회사 워크숍으로 갔던 방콕 여행이

마지막이었던 것 같았다.


그때는 단체 여행이었다.

정해진 일정, 정해진 식당, 정해진 호텔.

자유시간조차 정해져 있었다.

여권은 있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이번에는 달랐다.

완전한 자유.

완전한 선택.


충전기, 보조배터리, 이어폰.

그 정도면 됐다.

나머지는 거기서 사거나, 없어도 됐다.


가방이 거의 비어 있었다.

텅 빈 공간이 많았다.

예전 같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이것도 필요한데', '저것도 챙겨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그 빈 공간이 좋았다.

채워질 공간.

리스본에서 만날 것들로 채워질 공간.


중요한 건 짐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떠난다는 사실 자체였다.


가방 지퍼를 닫으며 생각했다.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표는 이미 끊었고,

가방은 이미 쌌고,

마음은 이미 떠났다.


3일 후면 인천공항에 서 있을 것이다.

출국장 게이트를 통과하는 순간,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한국어가 아닌 언어가 들릴 것이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을 것이고,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 익명성이 주는 자유.

그 낯섦이 주는 해방.


3일 후, 나는 리스본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문득 궁금해졌다.

리스본의 아침 공기는 어떤 맛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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