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2화 -
월요일 오후 두 시, 카페에 앉아 있었다.
평소 같으면 회의실에 앉아 있을 시간이었다.
프로젝트 진행상황을 보고하거나,
다음 주 일정을 정리하거나,
누군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아무도 찾지 않았고,
아무도 보고를 요구하지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이 여유로워 보였다.
급하게 뛰어가는 사람도 없었고,
핸드폰을 보며 바쁘게 통화하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카페 안도 평온했다.
노트북을 펼쳐놓고 작업하는 사람이 몇 명 있었지만,
회사에서 보던 그런 긴장감은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도 느렸고,
누구도 시계를 자주 노려 보지도 않았다.
한 테이블에는 두 명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중년쯤 되어 보이는 분들이었는데,
차분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급하지 않은 목소리, 여유로운 웃음.
평소에 느껴보지 못한 그런 풍광이었다.
다른 테이블에는 혼자 책을 읽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문 모습,
한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느리게 느껴졌다.
급하게 정보를 흡수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읽는 것 자체를 즐기는 것 같았다.
어쩌면 늘 바라왔던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근처 테이블에는 스케치북을 펼쳐놓고
뭔가를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바라보다가
다시 연필을 움직였다.
이런 평일 낮의 풍경을 본 게 언제였을까.
항상 회사에 있었으니까,
이 시간의 세상이 이렇게 다른 줄 몰랐다.
혹시, 무엇엔가 홀려있는 상태는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였다.
평소 같으면 온기도 잊은 채 후루룩 마시고 자리를 떠났을 텐데,
오늘은 천천히 맛을 느끼며 마셨다.
쓴맛 뒤에 오는 단맛,
혀끝에 남는 약간의 산미.
이런 걸 느낄 여유가 있다는 게 신기했다.
시계를 봤다. 두 시 반.
평소 같으면 "벌써 이 시간이야"라고 생각했을 텐데,
지금은 "아직 두 시 반이구나"였다.
시간이 다르게 느껴졌다.
빨리 지나가야 할 것이 아니라,
그냥 흘러가는 것.
재촉하지 않아도 되는 것.
그제야 깨달았다.
시간은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것을.
회사에 있을 때는 시간이 늘 부족했다.
항상 부족하고, 항상 재촉하고,
항상 뭔가에 쫓기게 만드는 것.
하지만 지금은 친구 같았다.
옆에 조용히 앉아 있는 친구.
핸드폰을 확인했다.
오늘따라 카톡도 없고,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누구도 찾지 않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불안했을 것이다.
뭔가 놓치고 있는 건 아닐까,
중요한 연락을 못 받는 건 아닐까.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오히려 홀가분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시간.
아무에게도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문득 지난주가 떠올랐다.
같은 시간, 같은 요일.
회의실에서 팀장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번 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데..."
"일정이 너무 빠듯한 것 같은데..."
"모두 힘내서 해보자."
그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앉아 있었다.
속으로는 한숨을 쉬면서도,
겉으로는 괜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와서는
할 일 목록을 정리했다.
오늘 할 것, 내일 할 것, 이번 주에 마무리할 것.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지금 이 순간과 얼마나 다른가.
할 일 목록도 없고,
마감도 없고,
누군가의 기대도 없다.
그런데 불안하지 않았다.
죄책감도 별로 없었다.
오히려 이상하게 평온했다.
카페 안에 잔잔한 음악이 흘렀다.
피아노 선율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쌌다.
가사도 없고, 멜로디만 있는 음악이었는데,
왜 그렇게 마음에 와닿는지 모르겠다.
음악을 들으며 하늘을 바라봤다.
나무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어떤 나무는 초록 잎이 무성했고,
어떤 나무는 노랑빛의 잎으로 물들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다.
일하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밖에서 보니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언제부터 계절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까.
언제부터 나무를 보지 않고 다녔을까.
언제부터 음악을 제대로 듣지 못했을까.
그런 것들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서 사라진 줄도 몰랐다.
너무 바빠서, 너무 정신없어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대로 있었다.
나무도, 바람도, 음악도, 햇살도.
잘, 세심히 보지 못했을 뿐이었다.
커피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따뜻한 온기가 손바닥에 전해졌다.
이런 작은 감각도 오랜만이었다.
잔을 들고 있는 손,
의자에 기댄 등,
바닥에 닿은 발.
몸이 여기 있다는 감각.
회사에 있을 때는 몸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다.
머리만 있고, 손만 있고,
나머지는 없는 것처럼.
하지만 지금은 온몸이 여기 있었다.
카페의 야외 테이블에, 이 조용한 오후에.
네 시가 되었다.
아직 해가 높이 떠 있었다.
하루가 길다는 걸 새삼 느꼈다.
회사에 있을 때는 하루가 금방 지나갔는데,
지금은 하루 안에 이렇게 많은 시간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 그림을 그리는 사람, 대화하는 사람들.
모두 각자의 속도로, 각자의 방식으로.
아무도 시간에 쫓기지 않고 있었다.
아무도 빨리 끝내려고 하지 않는 듯했다.
자신만의 착각일까. 착각이어도 좋다.
그냥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었다.
처음으로 지금 이 순간에만 있었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
커피잔이 거의 비었다.
하지만 이 즐거움을 떠날 생각이 없었다.
아직 이 평온함을 더 느끼고 싶었다.
휴직을 결정할 때는 무서웠다.
뭘 하며 시간을 보낼지 몰랐고,
무료할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전혀 무료하지 않았다.
오히려 풍성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이렇게 가득 찬 시간일 줄 몰랐다.
그러다 문득 불안이 스쳤다.
이 평화가 계속될 수 있을까.
3개월 후에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그때도 이 고요함을 기억할 수 있을까.
도망친 것 같은 죄책감도 밀려왔다.
지금 이 순간, 동료들은 회의실에 앉아
내가 해야 했을 일들을 나누고 있을 것이다.
나만 여기서 커피를 마시며 평온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평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될 때 찾아오는 것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햇살이 테이블 위로 기울어졌다.
빛이 따뜻했다.
이 빛도, 이 온기도, 이 고요함도
모두 이 시간의 것이었다.
아무도 가져가지 않는,
아무도 나누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
그 시간 안에서 처음으로
진짜 내면의 평화를 느꼈다.
그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야 숨을 쉬고 있는 것 같다"라고...
그런데 문득,
"내일은 어디로 가지?"
음… 그냥… 발길 닿는 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