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1화 -
휴직 신청서를 앞에 두고 펜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사유란에 뭐라고 써야 할까.
'개인 사정으로'라고 쓰기에는 너무 모호하고,
'건강상의 이유로'라고 하기에는 거짓말 같았다.
정확한 이유를 말하자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이대로 있으면 정말 무너질 것 같아서.
잠시라도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하지만 그런 말을 휴직 신청서에 쓸 수는 없었다.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했을까.
휴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한 것은.
처음에는 그냥 농담처럼 생각했다.
"아, 휴직이라도 하고 싶다"
힘든 날에 중얼거리는 푸념 정도로.
그런데 언제부턴가 진짜 찾아보게 됐다.
회사 휴직 제도, 신청 방법, 필요한 서류.
몰래 인사팀 홈페이지를 들어가서
휴직 규정을 읽어봤다.
질병, 육아, 가족 돌봄, 학업 등
개인적 사유로 인한 휴직 가능
개인적 사유.
그 네 글자가 묘하게 마음에 들어왔다.
나도 개인적 사유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
동료들은 휴직하는 사람을 어떻게 볼까.
"일 못하는 사람", "의지 약한 사람",
"회사에 민폐 끼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그런 시선이 두려웠다.
무엇보다 스스로에게 실망할까 봐 무서웠다.
'나는 포기하는 사람이야'라고
자신을 규정하게 될까 봐.
밤에, 친구와 통화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
"그냥... 비슷하게."
"목소리가 왜 그래? 많이 힘들어?"
한참을 말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었다.
모든 게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휴직을 생각하고 있어."
겨우 내뱉은 말이었다.
"그래? 좋은 생각이야."
예상외로 친구는 담담했다.
"그런데 주변에서 뭐라고 하지 않을까?"
"누가 뭐라고 해?"
친구가 반문했다.
"네 인생인데 왜 남 눈치를 봐?"
그 말이 마음에 박혔다.
내 인생인데 왜 남 눈치를 보고 있을까.
언제부터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내 선택을 판단하게 됐을까.
"포기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물었다.
"포기하는 게 뭔데?"
친구가 다시 물었다.
"휴식하는 게 포기야?
자신을 돌보는 게 포기야?"
그 순간 뭔가 명확해졌다.
포기와 도망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포기는 체념이다.
"어차피 안 될 거야"라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
더 이상 시도하지 않겠다는 선언.
하지만 도망은 다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한 선택.
더 나은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전략적 후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
지금 내가 하려는 것은 포기가 아니었다.
도망도 아니었다.
휴식이었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간다.
마음이 지치면 쉬어야 한다.
그것이 당연한 일인데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끝까지 견디는 것'을 미덕이라고 한다.
참는 것을 강함이라고 가르친다.
쉬는 것을 나약함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그게 정말 옳은 걸까.
무너지기 전에 멈추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 아닐까.
휴직 신청서를 다시 바라봤다.
이제는 무엇을 써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사유란에 썼다.
"심신 안정을 위한 개인적 휴식 필요"
거창하지 않았지만 정직했다.
부끄럽지 않은 이유였다.
누구에게나 필요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휴직 기간은 3개월로 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무엇을 할지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
그냥 쉬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보고하지 않고,
아무런 의무도 없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사치일까.
그런 시간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을까.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필요했다.
절실하게 필요했다.
서류를 봉투에 넣으면서 생각했다.
이것은 포기가 아니라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준비라고.
팀장에게 휴직 신청서를 건넸다.
"갑자기 웬 휴직?"
놀란 표정이었다.
"무슨 일 있어?"
"좀 쉬고 싶어서요."
간단히 대답했다.
길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요즘 힘들어 보이긴 했는데..."
팀장이 서류를 들여다봤다.
"3개월이면 꽤 긴데, 괜찮겠어?"
괜찮을지 모르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아도 일단 쉬고 싶다고,
쉬어야 괜찮아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다.
"네, 괜찮을 것 같아요."
팀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럼 인사팀에 제출하고
업무 인수인계 준비해."
생각보다 간단했다.
거창한 이유나 설득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그냥 쉬고 싶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였다.
동료들에게 휴직 소식이 전해졌다.
"부럽다", "나도 하고 싶다",
"푹 쉬고 와"라는 반응들이 돌아왔다.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누구도 나를 나약하다고 하지 않았다.
누구도 포기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부러워했다.
휴직 전 마지막 출근날이었다.
3개월 후에 다시 돌아올 자리.
그때는 어떤 마음일까.
지금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확신은 없었다.
휴직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닐 테니까.
여전히 힘들 수도 있고,
여전히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시간은 생겼다.
생각할 시간, 쉴 시간, 나를 돌볼 시간.
그 시간 동안 뭔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아니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았다.
시도해 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멈춰서는 것도 하나의 선택이었다.
도망이 아니라 휴식이었다.
회사 문을 나서면서 생각했다.
3개월 후에 이 문을 다시 열 때는
어떤 기분일까.
기대보다는 안도감이 컸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 같았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내일부터는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된다.
출근 준비를 하지 않아도 된다.
회의실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된다.
포기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도망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휴식이라는 걸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조용히 속삭였다.
이제 진짜 나를 돌볼 시간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