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겠을 때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10화 -

by 마르코 루시

점심 메뉴를 정하지 못했다.


동료들이 물었다.

"오늘 뭐 먹을까?"

"음... 아무거나."

"아무거나는 무슨, 네가 먹고 싶은 거 말해봐."

먹고 싶은 게 뭔지 모르겠었다.

정확히는 먹고 싶은 게 없었다.

어떤 메뉴를 들어도 특별히 당기지 않았다.


"중식? 한식? 일식?"

동료가 계속 물었다.

"다 괜찮아요."

"그럼 네가 정해."

결국 다른 사람이 정했다.

그게 편했다.

선택하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몰랐다.


식당에 앉아서도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봤다.

글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뭘 먹어도 상관없었다.

아니, 뭘 먹고 싶은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빨리 정해. 배고파."

동료의 재촉에 그냥 아무거나 골랐다.


음식이 나왔다.

먹었다.

맛있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었다.

그냥 삼켰다.


언제부터였을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모르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내비게이션을 따라 살았다.

부모님이라는 내비게이션,

선생님이라는 내비게이션,

친구들이라는 내비게이션.


"300미터 앞에서 우회전하세요."

"목적지까지 최단 경로로 안내합니다."

항상 누군가 경로를 알려줬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음성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스스로 길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됐다.


그런데 어느 날,

내비게이션이 꺼졌다.

아니, 혼자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갑자기 길 한복판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길이 맞는 길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스스로 길을 찾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분명했다.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놀이, 좋아하는 친구.

모든 게 명확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달라졌다.

"그 친구랑은 놀지 마. 공부 못하잖아."

친한 친구와 거리를 뒀다.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그 즐거움을 포기했다.

"피아노 학원 다녀야지. 남들 다 다니는데."

그림을 그리고 싶었지만

학원 가방을 메고 나갔다.

캔버스보다 악보가 손에 익었다.


중학교 때는 더했다.

"너 혼자만 다른 걸 좋아하면 왕따 당해."

친구들이 좋아하는 가수를 따라 좋아했다.

친구들이 보는 드라마를 따라 봤다.

진짜 좋아하는 건 혼자 몰래 즐겼다.


점심시간에 우유를 고를 때였다.

딸기 우유가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반 아이들 대부분은 초코 우유를 골랐다.

"딸기 우유? 그거 애기들 먹는 거 아니야?"

누군가 비웃었다.

그날부터 초코 우유를 마셨다.

딸기가 더 좋았는데.

달콤한 맛이 더 좋았는데.


고등학교 때는 진로를 정해야 했다.

"안정적인 직업이 좋아. 공무원이나 교사가 어때?"

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말하지 못했다.

현실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을까 봐.

꿈같은 소리 한다는 말을 들을까 봐.


대학교에서 전공을 선택할 때도 그랬다.

정말 하고 싶은 것보다

남들이 괜찮다고 하는 것을 골랐다.

취업이 잘 된다는 것,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것.

그렇게 선택하고 또 선택하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알 수 없게 됐다.


내비게이션에 익숙해지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늘 음성이 알려주니까.

우회전, 좌회전, 목적지까지 몇 미터.

그런데 배터리가 나가면?

갑자기 길 한복판에 홀로 서게 된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느 길이 맞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회사 동료가 물었다.

"주말에 뭐 해? 취미라도 있어?"

"음... 특별한 건 없어요."

"진짜 아무것도 안 해?"

아무것도 안 했다.

정확히는 할 게 없었다.

뭘 하고 싶은지 몰랐다.


집에 오면 소파에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SNS를 스크롤하고,

유튜브를 보고,

시간을 흘려보냈다.

특별히 재미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시간을 때우는 것뿐이었다.

뭔가를 하려고 해도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서점에 가도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몰랐다.

영화관에 가도 어떤 영화를 볼지 결정하지 못했다.

카페에 가도 어떤 음료를 마실지 한참 고민했다.


친구가 말했다.

"너는 진짜 하고 싶은 게 없어?"

대답할 수 없었다.

없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 같았다.


밤에 혼자 있을 때 생각했다.

'나는 대체 뭘 좋아하는 걸까?'

'뭘 하면 행복한 걸까?'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었다.

오랫동안 타인의 기준으로 살다 보니

자신의 기준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약속이 취소돼서 혼자 남았다.

계획 없는 오후가 너무 낯설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걷기 시작했다.

목적지 없이 걷다가

서점 앞을 지나게 됐다.

특별히 책을 사려던 건 아니었는데

발걸음이 저절로 안으로 향했다.


서가 사이를 걸었다.

소설, 에세이, 자기 계발, 인문.

수많은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뒤표지를 읽었다.

다시 꽂았다.

또 한 권을 집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다.

다시 꽂았다.


읽고 싶은 게 아니었다.

읽어야 할 것 같은 책만 눈에 들어왔다.

'베스트셀러', '화제의 책', '필독서'.

그런 책들만 손이 갔다.

정말 읽고 싶은 건 뭘까.

물어봐도 대답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책을 집어 들고

뒤표지를 읽거나

첫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어떤 이는 바구니에 책을 담았고,

어떤 이는 자리에 앉아 읽고 있었다.


그때 한 아이가 엄마 손을 잡아끌며 소리쳤다.

"엄마! 이 책! 이 책 사줘!"

아이는 주저 없이 자기가 원하는 책을 가리켰다.

표지의 공룡 그림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신났다.

엄마는 다른 책을 보여줬다.

"이거는 어때? 이게 더 유익한데."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나는 공룡 책이 좋아."

결국 엄마는 공룡 책을 사줬다.

아이는 책을 꼭 안고 환하게 웃었다.


모두 자기가 원하는 걸 고르고 있었다.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주말 오후의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슬픈 것도 아니었고,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눈물이 흘렀다.


한참 후에 깨달았다.

부러웠던 것 같았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아는 사람들이,

읽고 싶은 책을 주저 없이 고를 수 있는 사람들이.

특히 그 아이가 부러웠다.

'이게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

누가 뭐래도 자기 마음을 아는 것.


언제부터 그 확신을 잃어버렸을까.

'이거요. 이게 좋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능력을.

그녀에게는 그게 없었다.

읽어야 하는 책은 많았지만

읽고 싶은 책은 없었다.

고를 수 있는 것은 많았지만

고르고 싶은 것은 몰랐다.


서점을 나서면서 편의점에 들렀다.

음료를 사려고 냉장고 앞에 섰다.

손이 자동으로 늘 마시던 커피로 향했다.

그런데 멈췄다.

정말 커피가 마시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냥 습관적으로 고르는 걸까?


냉장고 안을 다시 천천히 둘러봤다.

커피, 주스, 탄산음료, 이온음료.

여러 가지가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정말 마시고 싶은 건 뭘까?'

한참을 서 있다가

딸기 우유를 꺼냈다.


손에 잡히는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3학년.

급식실에서 우유를 고를 때.

"딸기 우유? 그거 애기들 먹는 거 아니야?"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20년이 지났는데도.


편의점을 나와서 한 모금 마셨다.

달콤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그 맛 그대로였다.

눈물이 났다.

이유를 알 것 같았다.

20년 만에 처음으로

진짜 자신이 원하는 걸 골랐다.

초코 우유가 아니라 딸기 우유.

남들이 고르는 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

무난한 선택이 아니라 진짜 내 선택.

겨우 우유 하나 고르는 데

20년이 걸렸다.

벤치에 앉아 계속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이

20년 전 나와의 화해 같았다.


'진짜 좋아하는 걸 고르지 못해서 미안해.'

'이제는 괜찮아. 우리 이제 괜찮아.'

작은 선택이었지만

뭔가 달라지는 기분이었다.

내비게이션 없이도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조금씩 달라졌다.

작은 것부터 연습하기로 했다.

메뉴를 고를 때,

옷을 입을 때,

길을 걸을 때.

'지금 나는 뭘 원할까?'

'무엇이 나를 편하게 할까?'

'어떤 게 나를 기쁘게 할까?'


처음에는 어려웠다.

대답이 바로 나오지 않았다.

여전히 타인의 시선부터 생각했다.

내비게이션 음성을 찾았다.

하지만 계속 물었다.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봤다.

그러다 보니 조금씩 감이 잡혔다.

내비게이션 없이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페에서 메뉴를 고를 때.

예전에는 무난한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이제는 천천히 메뉴판을 읽어봤다.

그날의 기분에 맞는 것을 골랐다.


옷을 입을 때도 달라졌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걱정하기보다

자신이 입고 싶은 것을 입었다.

편하고, 마음에 드는 것을.


주말에도 변화가 생겼다.

억지로 약속을 잡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으면 혼자 있었다.

걷고 싶으면 걸었다.

책을 보고 싶으면 책을 봤다.

여전히 확신은 없었다.

이게 정말 자신이 원하는 건지

100%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물어볼 수 있게 됐다.

'나는 뭘 원하지?'라고.

그 질문만으로도 충분했다.


집에 돌아와 메모장을 펼쳤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라고 제목을 적었다.

첫 번째 줄에 썼다.

'딸기 우유.'

작은 시작이었지만

20년 만에 처음으로 쓴

진짜 자신의 리스트였다.


자신을 찾아가는 일은

거창한 게 아니었다.

작은 선택들의 연속이었다.


오늘은 뭘 먹을까.

오늘은 뭘 입을까.

오늘은 뭘 할까.


내비게이션 없이도 괜찮다는 걸 알았다.

길을 잃어도 괜찮다는 걸 배웠다.

돌아가도, 헤매도, 멈춰 서도 괜찮다.


중요한 건 누군가 정해준 길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길이라는 것.

내일 아침에도 물어보기로 했다.

'오늘 나는 어디로 가고 싶지?'

간단한 질문이지만

그것이 나만의 길을 찾는

첫 번째 걸음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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