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 필요 없고 도망가고 싶어 9화 -
컴퓨터 화면이 흐려 보였다.
아침부터 같은 문서를 열어놓고 있었는데,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 있었지만
아무것도 타이핑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생각이라는 게 들지 않았다.
그냥 하얗게 비어 있었다.
동료가 지나가면서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괜찮아?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좀 피곤해서요."
자동으로 나온 대답이었다.
괜찮지 않았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피곤한 게 아니라 무너지고 있었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식당에 가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았다.
아니, 배가 고픈지조차 모르겠었다.
모든 감각이 무뎌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렇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돌이켜보면 신호는 있었다.
몇 주 전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게 힘들었다.
알람을 무시하고 계속 누워 있고 싶었다.
출근하는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업무 집중력도 떨어졌다.
예전에는 한 시간이면 끝날 일이
하루 종일 걸렸다.
간단한 결정조차 내리기 어려웠다.
이메일 한 통 쓰는 데도 한참이 걸렸다.
주말에도 쉬지 못했다.
집에 있으면서도 계속 일 생각만 했다.
머릿속에서 업무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월요일이 되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피곤한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어도 자주 깼다.
꿈속에서도 일을 하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더 피곤했다.
몸도 이상했다.
두통이 잦았다.
어깨와 목이 항상 뭉쳐 있었다.
소화도 잘 안 됐다.
감기도 자주 걸렸다.
그래도 계속 버텼다.
'조금만 더'라고 생각했다.
'이번 프로젝트만 끝나면'이라고 되뇌었다.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산다'라고 믿었다.
어느 날 상사가 말했다.
"요즘 집중력이 떨어진 것 같은데,
좀 더 힘내줘야겠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녀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책했다.
'왜 이렇게 의지가 약할까.'
'다른 사람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못하네.'
'이 정도도 못 버티다니 한심하다.'
AI를 검색했다.
'업무 집중력 높이는 법'
'의욕 없을 때 극복하는 방법'
'게으름 이기는 방법'
여러 글들을 읽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세요"
"운동을 하세요"
"목표를 세우세요"
"의지를 강하게 가지세요"
그런 조언들을 보면서 더 무력해졌다.
그럴 힘조차 없었으니까.
긍정적으로 생각할 여력도,
운동할 기력도,
목표를 세울 의욕도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한 글을 읽었다.
'번아웃 증후군'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번아웃.
그 글을 읽으면서 소름이 돋았다.
거기 적힌 증상들이 모두 지금의 상태였다.
만성적 피로감.
업무 효율 저하.
감정적 고갈.
냉소적 태도.
성취감 감소.
특히 한 문장이 마음에 와닿았다.
"번아웃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에너지 고갈의 문제다."
그동안 이것을 의지 부족으로 생각했다.
나약해서, 게을러서, 노력하지 않아서
이런 상태가 된 거라고 자책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배터리가 다 닳은 것처럼,
더 이상 쓸 에너지가 없는 상태였다.
휴대폰 배터리가 바닥나면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켜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휴대폰이 나쁜 건 아니다.
그냥 충전이 필요한 것뿐이다.
나쁜 사람도, 나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였다.
충전이 필요한 상태였다.
번아웃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았다.
주변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요즘 누가 안 힘들어?"
"다들 그렇게 사는 거야."
"좀 쉬면 나아질 거야."
그런 말들이 위로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더 힘들게 만들었다.
유난 떠는 건가 싶었다.
다들 견디는데 혼자만 못 견디는 건가 싶었다.
부모님께 말씀드렸을 때도 그랬다.
"요즘 일이 너무 힘들어요."
"직장 생활이 원래 그런 거지.
조금만 참으면 괜찮아질 거야."
참으면 괜찮아질까.
이미 충분히 참았는데.
더 참으면 정말 괜찮아질까.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휴가 좀 쓰고 여행이라도 다녀와.
그러면 리프레시될 거야."
휴가를 쓸 만큼의 여유도,
여행을 계획할 에너지도 없었다.
무엇보다 휴가가 끝나면
다시 돌아와야 한다는 게 두려웠다.
번아웃은 단순히 피곤한 게 아니었다.
며칠 쉰다고 회복되는 것도 아니었다.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
이렇게 만든 건
일의 양만이 아니었다.
의미 없는 반복,
인정받지 못하는 노력,
끝없는 요구들.
무엇보다 자신을 돌보지 않은 것.
쉬어야 할 때 쉬지 않고,
힘들 때 힘들다고 말하지 않고,
한계를 무시하고 계속 달렸던 것이 문제다.
그날 저녁, 오랜만에 일찍 퇴근했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TV도 켜지 않고,
휴대폰도 보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창밖을 바라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하늘이 주황색에서 보라색으로 변해갔다.
그 변화를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곤 한참 후에 생각했다.
번아웃은 나약함이 아니라
한계를 알려주는 신호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는
몸과 마음의 절규였다.
그동안 그 신호를 무시했다.
의지로 극복하려 했다.
더 열심히, 더 강하게 되려고 했다.
하지만 필요한 건 더 강해지는 게 아니라
멈추는 용기였다.
쉬어도 괜찮다고 인정하는 용기였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고 받아들이는 용기였다.
번아웃을 겪는다고 해서
실패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열심히 살았기에
잠시 멈춰야 하는 사람이었다.
창밖 하늘은 이제 완전히 어두워졌다.
별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다.
내일 회사에 전화하기로 했다.
병가를 내고 병원에 가보기로.
더 이상 혼자 견디지 않기로.
그것이 나약함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라는 걸
이제는 알았다.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너무도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순간,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다 필요 없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