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타이페이, 빗속의 그녀

by 마르코 루시

그는 타이페이행 티켓을 끊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도망이라기엔 거창했고, 여행이라기엔 목적이 없었다. 인천국제공항의 탑승구 앞에서 이윤은 휴대폰의 전원을 껐다. 검은색 액정 화면 위로 피로에 절어 푸석해진 자신의 얼굴이 잠시 비쳤다. 34년의 시간 중 대부분을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았다. 마케팅 회사의 팀장이라는 직함, 적당히 성공한 커리어, 무난한 인간관계. 그 모든 것이 거대한 세트장처럼 느껴지던 순간, 그는 충동적으로 여권을 집어 들었다.

타이페이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그를 맞이한 것은 냄새였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더운 공기, 어딘가에서 풍겨오는 묘한 향신료 냄새, 그리고 아스팔트가 비에 젖을 때 나는 비릿한 흙내.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훅 끼쳐오는 그 무거운 공기가 그제야 그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이윤은 택시 뒷좌석에 몸을 구겨 넣었다. 차창 밖으로 회색빛 도시가 빠르게 지나갔다. 스쿠터 부대들이 빗속을 뚫고 질주했다. 우비를 입은 사람들의 등은 젖어 있었고, 신호등의 붉은 불빛만이 흐릿한 대기 속에서 선명하게 번졌다.

습관이 고개를 들었다. 스쿠터 행렬의 리듬, 우비 색상의 분포, 골목마다 겹쳐 걸린 간판들의 레이어링 - 그의 눈은 무의식적으로 구도를 잡고 있었다. 이 도시를 프레젠테이션 슬라이드 위의 무드보드로 재단하려는 직업병. 그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이 따위 짓을 하고 있다니.

그는 가방에서 낡은 필름 카메라를 꺼냈다.

'니콘 FM2'.

셔터가 고장 난 지 3년이 넘은 카메라였다.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수는 있지만, 셔터를 눌러도 필름에는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는다. 그는 찍히지 않는 카메라를 부적처럼 쥐고 있었다. 과거의 꿈, 혹은 미련. 고치지 않은 채 방치해둔 그것은 지금의 그와 닮아 있었다.

숙소는 중산(中山) 역 근처의 오래된 호텔이었다. 짐을 풀지도 않고 그는 거리로 나왔다. 우산은 없었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낮게 내려앉아 있었지만, 그는 굳이 비를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중산의 골목은 좁고 복잡했다. 낡은 건물들 사이로 세련된 카페와 편집숍들이 무질서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목적 없이 걸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누군가는 퇴근을 서둘렀고, 누군가는 저녁 식거리를 사 들고 있었다. 그 분주함 속에서 이윤만이 유일하게 멈춰 있는 점 같았다.

그때였다.

회색빛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색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낡은 붉은 벽돌 건물 1층, 문을 닫은 찻집 처마 밑이었다. 한 여자가 서 있었다.

그녀는 타이페이의 습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짙은 네이비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목에는 채도가 낮은 주황색 스카프를 아무렇게나 두른 채였다. 주변의 풍경이 채도가 낮은 수채화라면, 그녀는 유화 물감으로 거칠게 덧칠한 듯한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이윤은 걸음을 멈췄다.

네이비와 주황의 보색 대비, 회색 배경 위의 고채도 포인트 -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컬러 팔레트가 펼쳐졌다. 브랜드 화보라면 완벽한 구성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내 그 생각을 밀어냈다. 그녀가 휴대폰을 귀에 대고 무언가 빠르게 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리가 있어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녀의 미간은 좁혀져 있었고 한 손은 허공을 날카롭게 가르고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애원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윤은 무의식적으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뷰파인더 속에 그녀를 담았다. 초점을 맞추기 위해 렌즈 링을 돌렸다. 흐릿했던 형체가 선명해졌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피로, 헝클어진 금발 머리칼, 빗물에 젖어 색이 짙어진 코트 자락.

그는 습관처럼 셔터 버튼 위에 검지를 올렸다.

'철컥.'

묵직한 기계음이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다. 필름은 감기지 않았고, 이 순간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저 그의 눈과, 뷰파인더라는 사각의 프레임 속에만 잠시 머물다 사라질 허상이었다.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거칠게 휴대폰을 가방에 넣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든 그녀의 시선이, 렌즈 너머의 이윤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이윤은 카메라를 내렸다. 당황해서 시선을 피하거나 사과를 할 타이밍을 놓쳤다.

보통의 경우라면 불쾌해하거나 고개를 돌려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비에 젖은 채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이 동양인 남자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는 짙은 녹색이었다. 비에 젖은 숲처럼 깊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

그 정적을 깬 것은 비였다.

후두둑.

예고도 없이 굵은 빗방울이 아스팔트를 때리기 시작했다. 타이페이 특유의 국지성 호우, 스콜이었다.

길을 걷던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이윤도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가장 가까운 곳은 그녀가 서 있는 찻집의 처마 밑뿐이었다.

그는 짧게 목례를 하고 처마 밑으로 들어섰다.

공간은 협소했다. 두 사람이 서기에는 빠듯했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이윤은 최대한 그녀와 거리를 두기 위해 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빗줄기는 순식간에 폭포수처럼 변해 거리의 소음을 집어삼켰다. 세상에는 오직 빗소리만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이윤은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셔츠 한쪽이 젖어 차가웠지만, 오른쪽 어깨 너머에서 느껴지는 온기는 뜨거웠다.

그녀의 냄새가 났다. 비릿한 물 냄새 사이로 섞여 들어오는, 쌉싸름한 시트러스 향. 그리고 묘하게 건조한 담배 냄새.

이윤은 곁눈질로 그녀를 보았다. 그녀 역시 멍하니 비를 보고 있었다.

빗방울이 튀어 그녀의 구두를 적셨다. 그녀는 발을 뒤로 빼지 않았다. 마치 그 차가움을 즐기는 사람처럼, 아니면 감각이 무뎌진 사람처럼.

그녀의 주황색 스카프 끝자락이 바람에 날려 이윤의 팔뚝을 스쳤다.

스치고, 떨어지고, 다시 스치고.

부드러운 실크의 감촉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이윤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그는 숨을 멈췄다.

이 좁은 처마 밑에서, 타인과 이렇게 가까이 서 있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그는 그녀에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비가 많이 오네요, 라거나. 여행 오셨나요, 같은 상투적인 말들.

하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옆모습이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혹은 이 빗속으로 뛰어들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표정.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가방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라이터를 켰지만, 바람 때문에 불은 붙지 않았다.

치익, 치익.

부싯돌 갈리는 소리만 허무하게 반복됐다. 빗소리 위로 그 작은 마찰음이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귀에 박혔다. 그녀의 미간이 다시 찌푸려졌다. 짜증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이었다.

이윤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공항 편의점에서 샀던 일회용 라이터가 손끝에 걸렸다.

그는 말없이 라이터를 꺼내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불을 켜지는 않았다. 그저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건넸을 뿐이다.

그녀가 멈칫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윤의 손, 그리고 그의 무심한 얼굴로 옮겨갔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어 라이터를 가져갔다.

손가락 끝이 스쳤다.

차가웠다.

그녀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고, 이윤의 손은 열기로 뜨거웠다.

아주 짧은 순간의 접촉이었지만, 그 감각은 전류처럼 팔을 타고 올라와 척추를 건드렸다.

"......Merci."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빗소리에 묻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의 낮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두 손으로 불꽃을 감싸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눅눅한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라이터를 돌려주지 않고 자신의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이윤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시 침묵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침묵과는 달랐다. 빗소리 아래에 또 하나의 소리가 깔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호흡이 어느새 같은 간격으로 맞물려 가고 있었다.

나란히 선 두 사람 사이로, 보이지 않는 끈 같은 것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10분쯤 지났을까,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도로에는 다시 스쿠터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멈췄던 도시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

그녀가 먼저 움직였다. 그녀는 코트 깃을 세우고, 아직 가라앉지 않은 빗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두세 걸음 걷던 그녀가 멈춰 섰다. 뒤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그저 잠시, 웅덩이를 피해 선 것처럼 멈칫했을 뿐이다.

이윤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주황색 스카프가 잿빛 거리 속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그저 눈으로, 그 색깔을 쫓았다.

그녀가 골목 모퉁이를 돌아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이윤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처마 밑에는 그녀가 떨어뜨린 담뱃재와, 섞이지 못한 두 사람의 젖은 발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비는 그치지 않았지만, 이윤은 더 이상 습기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텅 빈 손을 쥐었다 폈다.

손끝에 닿았던 낯선 여자의 차가운 체온이, 화상처럼 남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