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타인의 거리, 1미터

by 마르코 루시

호텔 방은 지나치게 건조했다.

바깥세상의 그 축축하고 끈적거리던 습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에어컨은 낮은 소음을 내며 차가운 바람을 뱉어내고 있었다. 이윤은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멍하니 창밖을 응시했다. 밤이 깊었지만, 타이페이의 네온사인은 빗물에 번져 몽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보았다.

검지와 중지 사이, 라이터가 스쳐 지나갔던 그 자리.

몇 시간이 지났고, 샤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낯선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차갑고도 뜨거웠던 모순적인 온도. 그는 고장 난 니콘 FM2를 다시 집어 들었다. 뷰파인더에 눈을 갖다 댔다. 어두운 방안, 초점 맞지 않은 흐릿한 사물들이 프레임 안에서 유령처럼 부유했다.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프랑스어. 'Merci'라는 짧은 인사. 위태로워 보이던 눈빛. 그리고 돌아오지 않은 라이터.

이윤은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여행지에서의 우연은 불꽃놀이와 같다. 터지는 순간은 강렬하지만, 남는 것은 매캐한 연기와 어둠뿐이다. 그는 그 연기에 질식하고 싶지 않았다. 내일이면 잊혀질 기억이라 치부하며,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이윤은 늦게 일어났다.

조식 마감 시간을 30분 앞둔 식당은 한산했다.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와 낮은 중국어 대화 소리가 백색소음처럼 깔려 있었다. 그는 구석 자리에 앉아 식은 커피를 마셨다. 창밖은 여전히 흐렸다. 비는 그쳤지만, 도시는 물기를 머금은 채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의 일정을 고민했다. 단수이(淡水)에 가서 강을 볼까, 아니면 그냥 호텔 로비에서 책이나 읽을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없었으니까.

그때였다.

식당 입구 쪽에서 낯익은 색채가 시야에 들어왔다.

채도가 낮은 주황색.

어제 빗속에서 보았던 그 스카프였다.

이윤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멈췄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녀였다.

어제의 트렌치코트 대신 헐렁한 흰색 린넨 셔츠를 입고 있었지만, 목에는 여전히 그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다. 젖지 않은 금발 머리는 대충 묶어 올려 가느다란 목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녀는 이윤이 앉은 자리에서 두 테이블 떨어진 곳에 앉았다.

그녀는 혼자였다. 접시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직 에스프레소 한 잔과, 어제 보았던 그 가죽 가방만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가방 끈에 매달린 낡은 네임택 위로 ‘Claire’라는 알파벳이 은박으로 새겨져 있었다. 클레르. 이윤은 입술을 달싹이지 않고 속으로만 그 이름을 가만히 굴려보았다.

이윤은 시선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빤히 쳐다보는 건 무례하니까. 하지만 고개는 말을 듣지 않았다.

맑은 날의 그녀는 어제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빗물에 젖어 위태롭던 모습은 사라지고, 대신 건조하고 날카로운 예민함이 그 자리를 채우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악기 같았다. 줄이 끊어지기 직전, 가장 높은 음을 내는 순간의.

그녀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무언가를 찾는 손길이 분주했다.

이내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담배갑, 그리고 투명한 노란색 일회용 라이터였다.

이윤의 라이터였다.

그녀는 식당이 금연 구역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 쓴웃음을 지으며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하지만 라이터는 넣지 않았다. 그녀는 라이터를 손안에서 굴렸다.

달그락 달그락.

플라스틱 라이터가 그녀의 긴 손가락 사이를 오가는 소리가 식당의 백색소음을 뚫고 이윤의 귀에만 꽂혔다.

그 순간,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이윤은 숨을 멈췄다. 피할 수 없었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가 이윤을 정확하게 응시했다. 알아본 걸까? 어제 빗속의 그 남자를?

그녀의 눈동자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놀라움인지, 반가움인지, 아니면 경계심인지 알 수 없는 묘한 빛이었다.

이윤은 가볍게 목례를 해야 할지 고민했다. '제 라이터네요'라고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같은 호텔이었군요'라고?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는 사이, 그녀가 먼저 반응했다.

그녀는 라이터를 쥔 손을 들어, 아주 살짝 흔들어 보였다.

인사라기엔 은밀하고, 무시라기엔 명확한 제스처였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 그것은 어제의 'Merci'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스프레소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채였다.

그녀가 식당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이윤은 또다시 눈으로만 쫓았다.

오후 2시. 이윤은 호텔로 돌아왔다.

습한 더위에 지쳐 일찍 일정을 마무리한 참이었다. 로비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띵.'

도착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안에는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그녀였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구석에 기대어 서 있었다. 밖을 다녀온 것인지 다시 트렌치코트를 걸친 상태였다.

이윤은 잠시 멈칫하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혔다.

밀폐된 공간 기계적인 웅웅거림. 그리고 다시 맡게 된 그녀의 향기. 담배와 뒤섞인 그 묘한 체취가 좁은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나란히 섰다. 어제 처마 밑에서처럼,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

숫자판의 불빛이 하나씩 바뀌어 올라갔다. 3층, 4층, 5층.... 층수가 바뀔 때마다 '딩' 하는 작은 전자음이 울렸다. 그 반복적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박자처럼 쪼개고 있었다.

"6층?"

갑작스러운 목소리였다.

이윤은 화들짝 놀라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정면을 응시한 채, 무심하게 툭 던지듯 말했다. 영어였다.

이윤은 자신이 층수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6층 버튼 위를 맴돌고 있었다.

" 네. 6층입니다."

이윤이 영어로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그녀가 버튼을 눌렀다.

6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그녀가 누른 버튼과, 이윤이 가야 할 층이 겹쳐졌다.

"같은 층이네."

그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이윤을 올려다보았다.

엘리베이터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마주한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하지만 그 눈동자만은 살아있는 이끼처럼 선명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달싹였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것 같았다.

이윤은 그녀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든, 그녀가 한다면 대답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띵.'

야속하게도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키고, 짧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녀가 먼저 내렸다. 복도의 카펫 위로 그녀의 구두 소리가 먹먹하게 흡수되었다.

이윤은 한 발자국 뒤에서 걸었다.

그녀는 복도 끝, 609호 앞에서 멈췄다.

이윤의 방은 612호였다. 바로 맞은편이었다.

그녀가 카드키를 꺼내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가려던 그녀가, 문고리를 잡은 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복도에 서 있는 이윤을 보았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손에 쥐고 있던 노란색 라이터를 한 번 들어 보이고는, 방 안으로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의 정적을 잘랐다.

이윤은 609호의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옅게 남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머니를 더듬었다. 텅 빈 주머니.

라이터는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보다는 무언가가 채워졌다는 충만감이 가슴을 메웠다.

그는 자신의 방 문을 열며 생각했다.

타이페이에서의 7일.

이 비현실적인 도시에서, 그의 시계는 이제 막 돌기 시작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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