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9시의 스린(士林) 야시장은 거대한 용광로 같았다.
좁은 골목마다 붉은 홍등이 걸려 있었고, 수백 개의 노점에서 뿜어내는 열기와 연기가 밤하늘을 뿌옇게 메우고 있었다.
치익, 기름에 튀겨지는 지파이 소리. 상인들의 호객 행위가 양쪽 골목벽에 부딪쳐 울려 퍼졌다. 관광객들의 웃음소리가 그 위로 겹치고, 어디선가 대만어 노래가 흘러나왔다. 소음이 겹겹이 쌓여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밤이었다.
이윤은 인파에 떠밀려 걷고 있었다.
습도는 어제보다 더 높았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코끝을 찌르는 취두부 냄새와 달콤한 과일 향이 기이하게 섞여 있었다. 그는 셔츠 단추를 하나 더 풀었다.
혼자 오기엔 지나치게 활기찬 곳이었다. 그는 뷰파인더조차 들여다보지 않은 채, 목에 건 카메라를 무기력하게 만지작거렸다.
그때, 익숙한 금발 머리가 시야를 스쳤다.
수많은 흑발의 인파 속에서 그녀는 단연 눈에 띄었다.
클레르였다.
그녀는 과일 노점 앞에 서 있었다.
주인은 깎아놓은 석가(釋迦)를 그녀에게 내밀며 중국어로 무언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고,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지갑을 뒤적이고 있었다.
그녀의 하얀 린넨 셔츠 등 뒤가 땀으로 젖어 살색이 비쳤다. 그 모습이 묘하게 무방비해 보였다.
이윤은 잠시 망설이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그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다가가자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놀란 기색은 없었다. 마치 그가 올 줄 알았다는 듯, 혹은 이 인파 속에서 그를 기다렸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도 땀이 맺혀 있었다.
" 돈이 부족한가요?"
이윤이 한국어로 중얼거렸지만, 그녀는 알아듣지 못했다. 대신 어깨를 으쓱하며 빈 지갑을 보여주었다. 현금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이윤은 말없이 주머니에서 대만 달러 지폐 몇 장을 꺼내 주인에게 건넸다.
주인이 환하게 웃으며 비닐봉지에 담긴 과일을 건넸다.
그녀는 봉지를 받아 들고 이윤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Thanks."
그녀가 짧게 말했다. 이번엔 영어였다.
"갚을게요. 호텔에서."
"됐습니다. 얼마 안 해요."
이윤의 대답에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꼬치에 꽂힌 하얀 과일 조각 하나를 그에게 불쑥 내밀었다.
먹으라는 뜻이었다.
이윤은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맛이 입안에 퍼졌다.
그녀가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섰다.
두 사람은 야시장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대화는 없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벅찬 인파였다.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가 부딪쳤다.
탁, 하고 닿았다가 떨어지는 건조한 마찰. 하지만 그 마찰이 반복될수록, 이윤의 신경은 온통 오른쪽 어깨로 쏠렸다. 좁은 골목에서 오토바이 한 대가 경적을 울리며 달려들었다.
"비켜요!"
누군가의 고함 소리.
이윤은 반사적으로 팔을 뻗어 클레르의 어깨를 감싸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녀의 몸이 휘청하며 그의 가슴팍으로 무너져 내렸다.
순간, 야시장의 소음이 물속으로 가라앉은 것 같았다.
오토바이가 내뿜는 매캐한 매연 냄새 사이로, 그녀의 향이 훅 끼쳐왔다. 그녀의 젖은 등, 얇은 셔츠 너머로 느껴지는 뜨거운 체온, 가쁘게 오르내리는 숨결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윤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쥐고 있었다.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손가락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소음으로 가득 찬 시장통 한복판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얽혔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 속에, 홍등의 붉은 불빛이 어리어 있었다.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윤의 팔 안에 갇힌 채, 가만히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혹은 숨을 고르려는 듯.
" 괜찮아요?"
이윤이 겨우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잠겨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이윤의 손을 바라보았다.
이윤은 그제야 화들짝 놀라 손을 떼었다.
허공에 남은 손이 갈 곳을 잃고 배회했다.
"나가죠. 여긴 너무 시끄러워요."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녀는 이윤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아주 조심스러운, 그러나 명확한 손길이었다.
이윤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그녀가 잡은 소매 끝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것은 시장의 소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녀의 손떨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돌아오는 택시 안은 고요했다.
두 사람은 뒷좌석 양끝에 떨어져 앉았다.
창밖으로 타이페이 101 타워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윤은 창문에 머리를 기대고 밖을 보는 척했지만, 유리창에 비친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었다. 그녀는 아까 산 과일 봉지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 가방에서 노란색 라이터를 꺼내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달그락. 달그락.
그 소리가 규칙적인 리듬처럼 차 안에 울렸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대만 가요의 멜로디와 기이하게 박자가 맞았다.
호텔 로비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자정을 넘기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6층에 멈췄다.
복도는 여전히 적막했다.
609호와 612호. 서로의 방 문 앞에서 두 사람은 동시에 멈춰 섰다.
"잘 자요."
이윤이 먼저 말했다.
그녀는 카드를 꽂으려던 손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이윤의 얼굴을, 어깨를, 그리고 목에 걸린 낡은 카메라를 천천히 훑었다.
"내일."
그녀가 불쑥 입을 열었다.
"비가 온대요."
뜬금없는 날씨 이야기였다.
이윤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깜빡이는 사이, 그녀가 덧붙였다.
"우산, 있어요?"
이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습니다."
그녀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노란색 라이터를 꺼내, 엄지로 튕겨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딱. 딱.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럼 내일 봐요. 1층에서."
그녀는 그 말만을 남기고 609호 안으로 사라졌다.
문이 닫혔다.
이윤은 멍하니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귓가에서 뛰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불도 켜지 않은 채 침대에 걸터앉았다.
오른쪽 어깨.
오토바이를 피하며 그녀를 안았던 그 자리가, 홧홧하게 달아올라 식을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