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우산 아래, 빗소리의 감옥

by 마르코 루시

그녀의 예언대로, 비가 내렸다.

그것도 아주 거세게.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 쏟아지는 폭우가 타이페이의 아침을 회색빛으로 지워버렸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너무 요란해서, 이윤은 잠에서 깨자마자 어젯밤의 약속이 꿈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오전 11시, 호텔 로비.

이윤은 소파에 앉아 젖은 우산들이 꽂혀 있는 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시계의 초침이 12를 향해 가고 있었다. 손바닥이 축축했다.

그는 카메라의 렌즈 캡을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했다.

"늦어서 미안해요."

목소리와 함께 젖은 공기가 훅 끼쳐왔다.

고개를 들자, 클레르가 서 있었다.

그녀는 비에 젖은 어깨를 털며 웃고 있었다. 오늘은 트렌치코트 대신 헐렁한 니트와 발목이 드러나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는 투명한 비닐우산 하나가 들려 있었다.

단 하나였다.

"우산이 없다고 했죠?"

그녀가 물었다. 이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우산을 이윤에게 내밀었다.

"당신이 들어요. 키가 더 크니까."

투명한 우산 위로 빗방울이 맹렬하게 부딪쳐 부서졌다.

후두둑, 투두둑.

우산 속은 세상과 격리된 작은 방 같았다. 빗소리가 외부의 소음을 완벽하게 차단해 주었기에, 두 사람의 숨소리와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이 선명하게 들렸다.

두 사람은 중정기념당(中正紀念堂)의 넓은 광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이 폭우 속에 산책을 나온 사람은 그들뿐이었다.

하얀 대리석 바닥 위로 빗물이 강처럼 흘렀다.

이윤은 우산을 그녀 쪽으로 조금 더 기울였다. 그 탓에 그의 왼쪽 어깨는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클레르는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윤의 팔에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붙어 걸었다.

그녀의 보폭은 느렸다. 목적지가 없는 사람처럼, 아니면 이 비를 최대한 오래 즐기려는 사람처럼.

"타이페이는 울기 좋은 도시에요."

그녀가 불쑥 말했다. 빗소리를 뚫고 들려온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비에 젖은 건지, 눈물에 젖은 건지."

이윤은 걸음을 멈췄다. 그녀도 따라 멈췄다.

우산 아래서 두 사람은 마주 보았다.

그녀의 화장기 없는 얼굴이 창백했다. 야시장에서 보았던 생기는 사라지고, 다시 그녀를처음보았던 그 위태로운 표정이 돌아와 있었다.

"울고 싶습니까?"

이윤이 물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노란색 라이터였다.

그녀는 습관처럼 부싯돌을 튕겼다.

치익.

하지만 눅눅한 습기 때문인지, 바람 때문인지 불은 붙지 않았다.

치익, 치익.

허무한 마찰음만 반복됐다.

그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는 짜증스러운 손짓으로 라이터를 흔들었다.

그때, 이윤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쥐었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윤의 손은 따뜻했고, 빗물에 젖은 그녀의 손은 차가웠다.

그는 그녀의 손에서 라이터를 뺏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손등을 덮어, 그 무의미한 반복을 멈추게 했을 뿐이다.

"안 켜지는 게 아닙니다."

이윤이 나직하게 말했다.

"지금은 때가 아닌 겁니다. 비가 그치면 켜지겠죠."

그것은 라이터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동시에 그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윤의 손안에서 자신의 손을 뺐다.

그리고는 라이터를 주머니에 넣는 대신, 꽉 쥐었다.

" 당신 카메라도 그래요?"

그녀의 시선이 이윤의 가슴에 매달린 낡은 카메라로 향했다.

"어제부터 한 번도 찍는 걸 못 봤어요. 그냥 만지작거리기만 하고."

이윤은 카메라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뷰파인더를 눈에 갖다 대지 않고, 허리춤에서 카메라를 들어 올렸다. 렌즈가 비에 젖은 광장의 풍경을, 그리고 그 앞에 선 그녀를 향했다.

"고장 났거든요."

"고장?"

"필름이 감기지 않아요. 셔터는 눌리지만, 기록되지는 않습니다."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이윤은 검지를 셔터 위에 올렸다.

"그래서 좋아합니다. 찍히지 않아서."

"………………왜요?"

"사라지니까요. 이 순간은 그냥 지나가야 하니까. 기록해서 남기려다 보면, 정작 지금을 놓치게 되거든요."

철컥.

그가 셔터를 눌렀다.

묵직한 기계음이 우산 속의 정적을 갈랐다.

사진은 찍히지 않았다. 필름은 돌아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클레르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는 렌즈를 응시하던 시선을 거두고, 카메라 너머의 이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우산 속의 공간이 좁아졌다. 서로의 숨결이 얼굴에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녀가 손을 뻗었다.

그녀의 하얀 손가락이 이윤의 카메라 렌즈를 덮었다.

마치 그가 보는 세상을 막으려는 듯, 아니면 그 고장 난 눈을 위로하려는 듯.

"찍지 마요."

그녀가 속삭였다.

"기록되지 않아도, 내가 기억할 테니까."

그녀의 손끝이 렌즈를 타고 올라와, 카메라를 쥔 이윤의 손등을 스쳤다.

전류가 흘렀다.

어제 야시장에서의 사고 같은 접촉과는 달랐다.

이것은 명백한 의지였고, 조용한 유혹이었다.

이윤은 숨을 멈췄다.

빗소리가 멀어졌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만이 세상의 전부가 된 것 같았다.

그는 우산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충동이 이성의 댐을 무너뜨리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 역시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그 좁은 우산 속에서, 서로의 결핍을 확인한 공범자들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번쩍, 하고 빛났다.

우르릉- 쾅!

거대한 천둥소리가 머리 위에서 터졌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이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이윤은 젖은 우산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를 한 팔로 감싸 안았다.

그녀의 차가운 뺨이 그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천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 조금만."

그녀가 그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비가 그칠 때까지만, 이러고 있어요."

이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를 감싼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우산 밖은 여전히 폭우였다.

하지만 이 투명한 막 안에서, 두 사람은 처음으로 젖지 않은 채 서로의 온도를 나누고 있었다.

고장 난 카메라는 두 사람의 심장 사이에서, 여전히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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