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펀(九份)은 가파른 절벽 위에 위태롭게 매달린 마을이었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버스로 한 시간 남짓 달려 도착한 그곳은, 어제까지 머물렀던 타이페이 시내와는 공기의 밀도가 달랐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짠내 섞인 바람이 콧속을 서늘하게 파고들었다.
"사람이 많네요."
클레르가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대로 좁은 골목은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취두부 냄새, 땅콩 아이스크림의 단내, 그리고 수많은 언어가 뒤섞인 소음이 골목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그 인파 속에서도 서로를 놓치지 않았다.
이윤은 앞장서서 인파를 헤쳤고, 클레르는 그의 옷자락을 잡지 않은 채 한 걸음 뒤에서 조용히 그의 발자국을 밟으며 따라왔다. 그녀의 구두 뒤축이 돌계단을 딛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톡, 톡, 톡. 그 소리가 사라지면 안 될 것 같아 그는 보폭을 줄였다.
예전의 이윤이었다면 이 골목을 다르게 보았을 것이다. 홍등의 배치 간격, 간판의 서체 선택, 관광객 동선의 병목 구간. 하지만 지금 그의 귀에는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발소리만이 또렷했다.
해 질 녘이 되자, 하늘이 짙은 푸른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지우펀의 상징인 수치로(豎崎路) 계단에 걸린 수백 개의 홍등에 불이 켜졌다.
탁, 탁, 탁.
연쇄적으로 붉은빛이 터져 나왔다.
회색빛이었던 골목이 순식간에 비현실적인 붉은색으로 물들었다. 마치 이승이 아닌 다른 차원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
사람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이윤에게는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오직 붉은빛을 받아 장미색으로 상기된 클레르의 얼굴만이 시야에 가득 찼다.
"여기서 멈춰요."
그녀가 멈춰 섰다.
계단 중턱,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가장 붐비는 곳에서 살짝 벗어난 난간 옆이었다.
그녀는 난간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푸른 바다와 멀리 보이는 항구의 불빛들이 별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약속, 기억하죠?"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윤을 보았다.
홍등의 붉은 그림자가 그녀의 눈꺼풀 위로 내려앉았다.
"모델이 되어준다는 거."
이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평생 렌즈 뒤에 숨어 살아왔다. 피사체를 관찰하고, 프레임을 자르고, 셔터를 누르는 권력은 항상 그에게 있었다. 누군가의 시선을, 그것도 이렇게 적나라한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은 익숙지 않은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가 어색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요."
그녀가 한 발짝 다가왔다.
"그냥 거기 서서, 나를 봐요. 카메라는 내려놓고."
이윤은 목에 걸린 카메라를 손으로 감싸 쥐었다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무방비 상태.
그는 난간을 등지고 섰다. 머리 위에는 거대한 홍등이 흔들리고 있었고, 눈앞에는 클레르가 서 있었다.
그녀는 카메라를 꺼내지 않았다. 휴대폰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두 눈으로 그를 담기 시작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윤의 머리카락에서 시작해, 긴장으로 굳은 미간, 그리고 꾹 다문 입술로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혹은 조각가가 점토를 만지듯 섬세하고 집요한 시선이었다.
이윤은 숨이 막혔다.
그녀의 초록색 눈동자 속에 붉은 홍등과, 그 홍등 아래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그 작은 동공 속에 갇힌 자신이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가면처럼 쓰고 있던 마케터의 표정, 실패한 사진작가의 자괴감, 그 모든 껍데기가 그녀의 시선 앞에서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웃지 않는군요, 당신은."
한참 만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웃을 일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슬퍼 보이지도 않아요. 그냥 텅 비어 보여요."
그녀가 손을 뻗었다.
차가운 손가락이 이윤의 뺨에 닿았다.
카페에서 라이터를 만지던 그 손길처럼, 그녀는 이윤의 얼굴 윤곽을 천천히 훑었다.
"그래서 좋아요. 내가 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녀의 엄지가 이윤의 입술 끝을 살짝 스쳤다.
이윤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주변의 소음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발소리도, 호객꾼의 외침도 사라지고, 오직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만이 세상의 전부가 되었다.
그는 충동적으로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늘고 하얀 손목.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는 그녀를 끌어당기고 싶었다. 이 붉은 등 아래서, 텅 빈 속을 그녀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잡은 손목을 천천히 내려, 자신의 가슴 위에 얹었다.
고장 난 카메라 바로 옆, 심장이 뛰는 그 자리에.
"………………채워졌습니까?"
이윤이 낮게 물었다.
그녀는 손바닥으로 그의 심장 박동을 느꼈다. 쿵, 쿵, 쿵. 규칙적이지만 거세게 뛰는 진동이 그녀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만족감과 안도감이 뒤섞인, 묘하게 관능적인 미소였다.
"아직요."
그녀가 속삭였다.
"조금 더 담아갈래요. 오늘 밤은 기니까."
지우펀을 내려오는 버스 안은 고요했다.
두 사람은 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마을의 불빛들이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렸다.
산길을 내려오며 버스가 크게 흔들릴 때마다, 두 사람의 어깨와 허벅지가 닿았다 떨어졌다.
이제는 누구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접촉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두 사람은 미세하게 서로의 쪽으로 몸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윤은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붉은 등. 그리고 그 붉은빛을 배경으로 자신을 응시하던 그녀의 초록색 눈.
그는 자신이 영원히 그 눈동자 속에 박제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필름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녀의 망막이라는 가장 은밀한 앨범 속에.
주머니 속의 노란색 라이터가 허벅지에 닿아 달그락거렸다.
그는 손을 넣어 라이터를 꽉 쥐었다.
타이페이에서의 5일째 밤이 지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이틀.
그 숫자가 처음으로 두렵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버스가 터널을 지났다.
잠시 찾아온 어둠 속에서, 클레르의 손이 슬그머니 넘어와 이윤의 손등을 덮었다.
깍지를 끼지는 않았다. 그저 덮어두기만 했다.
하지만 그 무게감은 어떤 구속보다도 무거웠다.
이윤은 그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터널의 끝, 다시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도 두 사람의 손은 포개어진 채 떨어질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