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커튼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아침 햇살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이윤은 침대 옆 협탁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에는 항공사에서 보낸 알림 메시지가 와 있었다.
[모바일 체크인 안내 : 타이페이(TPE) → 서울(ICN)]
그 짧은 문장이 사형 선고처럼 느껴졌다. 이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
타이페이에서의 6일째 아침.
내일이면 그는 이 덥고 습한 도시를 떠나야 한다. 에어컨 바람이 건조한 사무실, 의미 없는 회의, 셔터를 누르지 않는 삶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제 지우펀에서의 붉은 밤이 전생의 기억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그는 샤워기 물줄기 아래서 한참을 서 있었다. 뜨거운 물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마치 멈출 수 없이 흘러내리는 시간처럼.
로비에서 만난 클레르는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다.
커다란 검은색 프레임이 그녀의 초록색 눈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어제의 그 대담했던 손길과 눈빛은 선글라스 뒤로 숨어버린 듯했다.
"다안(大安) 삼림공원에 가요."
그녀가 건조하게 말했다.
이윤은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든 상관없었다. 시간이 멈추는 곳이라면 어디든.
한낮의 공원은 고요했다.
오래된 나무들이 짙은 녹음(綠陰)을 드리우고 있었고, 그 사이로 매미 소리가 귀가 따갑도록 울려 퍼졌다. 맴맴맴-. 그 소리는 초침처럼 끈질기게 두 사람을 따라다녔다.
그들은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눈앞에는 붉은 꽃이 핀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윤은 목이 탔다. 편의점에서 산 생수병을 땄지만, 미지근해진 물은 갈증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언제 가요?"
클레르가 물었다. 시선은 여전히 정면의 나무에 고정된 채였다.
올 것이 왔다.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내일 오후 2시 비행기입니다."
이윤이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매미 소리가 그 공백을 채웠다.
"나는 저녁 6시."
그녀가 덧붙였다.
"파리로 가는 직항이에요. 13시간이 걸리죠."
오후 2시와 저녁 6시. 서울과 파리. 비행시간 2시간 30분과 13시간.
숫자들이 공중에서 부딪쳐 산산조각이 났다. 어제 버스 안에서 맞잡았던 손의 온기만으로는 좁힐 수 없는 거리였다.
"돌아가면………………."
이윤이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
돌아가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연락해도 될까요?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수많은 질문이 혀끝에서 맴돌았지만, 차마 뱉을 수 없었다. 그녀의 선글라스가 그를 밀어내는 방패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돌아가면, 바쁘겠죠."
클레르가 그의 말을 가로채며 대답했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지 않았다. 하지만 뺨 위로 땀방울 하나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망친 쇼를 수습해야 하고, 투자자들을 만나야 하고, 다시 디자인을 해야 해요. 숨 쉴 틈도 없이."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했지만, 손은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놓인 가방끈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당신도 그렇잖아요."
그녀가 고개를 돌려 이윤을 보았다. 검은 렌즈 속에 이윤의 굳은 얼굴이 비쳤다.
"우린 원래 고장 난 사람들이니까. 여기는 그냥 잠시 비를 피하러 온 처마 밑 같은 거예요."
이윤은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반박하고 싶었다. 아니라고, 내 고장 난 카메라는 당신을 만나서 다시 숨을 쉬기 시작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마케터였다. 현실을 계산하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것에 익숙한 어른이었다. 서울의 이윤과 파리의 클레르, 그 사이에 놓인 현실의 벽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군요."
이윤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대답을 뱉었다.
그의 대답에 클레르의 입술이 살짝 깨물렸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돌려 나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더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지고, 매미 소리가 잦아들고.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클레르가 불쑥 일어섰다.
"배고파요."
그녀가 말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목소리였지만, 오후 내내 무너지려던 것을 애써 추스르는 어조가 묻어 있었다.
그들은 공원 근처의 허름한 우육면(牛肉麵) 가게로 들어갔다.
형광등 불빛이 파르스름한 좁은 식당이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 기름때가 낀 벽면의 메뉴판, 부엌에서 들려오는 국자와 냄비가 부딪치는 소리. 세련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공간이었다.
이윤은 두 그릇을 주문했다. 손짓과 메뉴판의 사진으로.
뜨거운 국물이 담긴 그릇이 나왔다. 검붉은 국물 위로 두꺼운 면발이 보였고, 푹 고은 소고기 덩어리가 위에 올라가 있었다.
클레르는 젓가락질이 서툴렀다. 면을 집으려다 미끄러져 국물이 튀었다. 흰 니트 위로 붉은 국물 자국이 번졌다.
"아."
그녀는 자국을 내려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여전히 서툴렀다. 이윤은 말없이 식당 한쪽에 놓인 스테인리스 포크를 가져다 그녀 앞에 놓았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 고마워요."
그 말은 포크에 대한 감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포크를 집는 대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이번에는 면 한 가닥을 겨우 집어 올렸다. 후루룩, 서투르게 빨아들이는 소리가 났다.
이윤도 면을 먹었다. 뜨겁고 진한 국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놀랍도록 맛있었다. 이 허름한 가게의 국물이, 이번 여행에서 먹은 것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따뜻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면을 먹었다.
후루룩, 후루룩.
면 빨아들이는 소리. 국자가 부딪치는 소리. 옆 테이블의 대만인 아저씨가 후추를 갈아 넣는 소리. 그 소박한 소음들이 두 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클레르의 면이 불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국물만 떠먹으며 멍하니 그릇 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윤은 자신의 젓가락으로 그녀의 그릇에서 면을 건져, 작은 접시에 옮겨 놓았다.
클레르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 선글라스 없는 얼굴. 허름한 식당의 형광등 아래서, 그녀는 지우펀의 홍등 아래보다 더 벌거벗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면을 한 젓가락 집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오래 씹었다.
국물이 식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릇을 치우자고 말하지 않았다.
마지막 밤이었다.
호텔로 돌아오는 길.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혹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이라면 이 밤을 그냥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의 숫자가 6을 가리켰다.
문이 열렸다.
고요한 복도. 609호와 612호.
클레르가 방문 앞에서 멈췄다.
그녀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하루 종일 감추고 있었던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충혈되어 있었다.
"잘 자요."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듯, 서둘러 카드를 꽂았다.
삐릭. 문이 열리는 소리.
"클레르."
이윤이 그녀를 불렀다. 처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등 뒤에서.
그녀가 멈칫했다. 문고리를 잡은 손이 하얗게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내일, 공항 가기 전에."
이윤은 마른 입술을 죽였다.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문을 열고, 도망치듯 방 안으로 사라졌다.
달칵.
문이 닫혔다.
이윤은 닫힌 문 앞에 홀로 남겨졌다.
복도에는 차가운 에어컨 바람만이 그의 등을 식히고 있었다.